■ 화성시청 육상팀 맡아 본격 트랙 복귀
장재근 화성시청 육상팀 감독(앞줄 가운데)이 17일 제주시 종합운동장 앞에서 전지훈련중인 화성시청 선수들과 함께 파이팅을 외치고 있다. 제주=김동욱 기자 creating@donga.com
1980년대 한국 최고의 스프린터였던 장재근(51). 1990년 은퇴한 뒤 트랙과 멀어졌던 그는 화성시청 육상팀 감독으로 복귀했다. 16일 제주도에서 전지훈련 중인 그는 의욕이 넘쳤다.
○ 트랙을 떠나 방송으로
“사실 트랙으로 돌아가고 싶었죠. 하지만 돈벌이가 좋았어요. 가정을 꾸리고 살다 보니 돈을 더 벌 수 있는 방송에 마음이 혹할 수밖에 없었죠. 육상으로 돌아가고 싶어도 추천해 주는 사람도 없었죠. 게다가 예전 명성 때문에 돈을 많이 줘야 한다는 지레짐작으로 제의하는 사람도 없었어요.”
방송인 장재근은 한때 잘나갔다. 에어로빅 강사로 활동할 때는 일반 직장인의 연봉을 한 달 만에 벌기도 했다. 주부들에게 특히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잘나가는 연예인 부럽지 않았다. 하지만 속은 편하지 않았다. 마음속에는 언제나 육상인이라는 자부심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창피했었죠. 하지만 가정을 책임져야 하는 사람인데 창피하다고 돈을 벌지 않을 수 없잖아요. 저라고 자존심도 없는 줄 알아요? 그래도 그 자존심을 덮어준 것이 돈이었어요. 많이 벌었어요. 당시 서울 평창동 산꼭대기 3층짜리 집에서도 살았어요. 그 정도면 얼마나 잘살았는지 알겠죠?”
○ 세 번의 기회와 좌절, 그리고 희망
“정말 열심히 했어요. 하지만 월급이 너무 적었어요. 500만 원 쓰다가 200만 원 쓰려니 힘들었죠. 일요일에 홈쇼핑에 나가 부업을 했죠. 하지만 연맹은 이를 용납하지 못했고 결국 대표팀 코치를 그만뒀죠.”
코치를 그만둔 뒤 홈쇼핑과 광고 모델 외에는 변변한 일자리도 없었다. 기업에서 특강 제의가 오면 마다하지 않았다. 돈 되는 일이라면 주저하지 않았다. 2003년 대표팀 감독으로 두 번째 기회가 왔다. 그러나 이번에도 오래가지 못했다.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닌데 듣기 싫은 말을 많이 했어요. ‘우리 육상이 아시아에서 꼴등이다. 반성해야 한다’고 떠들고 다니니 윗사람들이 싫어했죠. 2년 만에 물러났죠.”
그는 4년 만인 2009년 단거리 트랙기술위원장을 맡으며 다시 트랙으로 돌아왔다. 보수는 없었지만 열심히 선수들과 부대꼈다. 그 덕분에 한국 기록을 무려 12번이나 갈아 치우며 승승장구했다. 그러나 이번에도 연맹 집행부와의 갈등이 또다시 발목을 잡았다.
젊은 시절 투혼을 불살랐던 트랙으로 장재근을 돌아오게 한 힘은 그의 세 자녀다.
“예전에 애들이 ‘아빠 직업은 뭐야’ 물으면 대답하기 힘들었어요. 대학 강사? 홈쇼핑 호스트? 사업가? 전 육상선수? 힘들었죠. 이젠 떳떳해요. 실업팀 감독이라고 얘기할 수 있잖아요.”
그는 요즘 행복하다는 말을 입에 달고 다닌다. “선수들 가르치는 것이 천직인 것 같아요. 제일 좋은 것 같고요. 제 느낌에 화성시청 감독이 인생의 전환점이 될 것 같아요. 제 인생은 롤러코스터 그 자체였어요. 다 제 탓이죠. 돌고 돌았지만 이제 제 길을 찾아 너무 행복합니다. 하하.”
제주=김동욱 기자 creati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