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적의 정책까지 수용한 DJ ‘현실감각’ 배워야 길 열린다”
윤평중 한신대 교수(철학)는 대선 패배 후 좀처럼 항로를 찾지 못하는 민주통합당에 “김대중(DJ) 전 대통령을 공부해야 한다. 중도자유주의 노선을 내걸고 서생의 문제의식과 상인의 현실감각으로 무장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인터뷰 도중 메모지에 ‘서생의 문제의식, 상인의 현실감각’이란 문구를 쓰고 여러 번 밑줄을 긋기도 했다. 최혁중 기자 sajinman@donga.com
―DJ의 어떤 점을 배워야 하나.
“DJ는 자신만의 정치 철학이 있었다. 그러나 고집하지 않고 그때그때 맞게 변형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도입한 기초적인 복지 정책(의료보험제도)을 토대로 빈칸에 여성, 사회보장정책을 채워 넣었다. 최대 정적(政敵)의 정책까지도 자기화하는, 이것이 상인의 현실감각이다.”
―민주당은 노무현 전 대통령과 함께 DJ를 ‘정신적 지주’로 내세우고 있는데….
―대선 패배 이후 노선과 정체성을 놓고 갑론을박이 한창이다. 어떻게 가야 한다고 보나.
“‘중도자유주의’로 가야 한다. 민주당은 창당(1955년) 때부터 ‘중도 정당’을 표방했다. 또 한국 야당의 뿌리, 민주당의 뿌리에 해당하는 분들이 강조했던 것이 자유주의다. 북한, 분단이란 제약 때문에 ‘진보’란 용어에 대해선 반감이 있다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
―민주당 내에선 더 좌(左)클릭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는데….
“독일의 민주사회당은 고데스베르크 강령(1959년·‘우리는 노동자 계급 정당이 아니라 국민의 정당이다’란 내용)을 채택해 대중 정당으로 거듭났고, 영국 노동당은 ‘제3의 길’을 내걸고 집권했다. 정권 창출을 위해 오른쪽으로 이동했다. DJ 식으로 치면 상인의 현실감각을 발휘한 것이다. 반면 프랑스 공산당은 우(右)클릭을 거부하다 사라졌다. 변화를 거부하는 것은 세계사적 관점에서 수구(守舊)요, 반동(反動)이다.”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의 강점을 너무 무시한 표현이다. ‘지기 쉽지 않은 선거에서 졌다’ 정도가 적절하겠다. 정권 교체를 바라는 국민이 절반을 훨씬 넘었고, 이명박 정부에 대한 환멸, 반감도 심했는데도 패했지만.”
―패인, 뭐라고 보나.
“부관참시(剖棺斬屍) 하는 것 같지만 문재인이란 약체 후보가 최대 패인이다. 워낙 급조돼 파괴력이 약했다. 독자적인 매력이 부각되지 않았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참모라는 이미지는 너무 강했다. 경제 위기, 북한 문제 등이 중차대한 상황에서 ‘왜 내가 대한민국이란 거함을 끌고 가야 하느냐’에 대한 답변, 카리스마를 보여 주지 못했다. 변화에 대한 국민의 욕구를 담아 내기엔 여물지 못한 상태였다. 또 민주당은 정치의 요체인 ‘책임정치’를 보여 주지 못했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과 제주 해군기지에 대한 말과 행동을 바꿔 국민의 신망을 잃었다. 이 두 가지 사안은 국민이 ‘우리의 운명을 맡길 수 있겠나’를 묻는 리트머스 시험지였다. 노무현 정부가 잘한 것도 많은데 친노(친노무현) 세력이 완장 찬 듯 설치면서 민심의 역린(逆鱗)을 건드렸다. 대선 바로 몇 달 전 총선 때도 ‘이렇게 가선 안 된다’라는 얘기가 많았는데도 무시했다. 그러니 질 수밖에.”
―박 당선인의 강점을 무시했다는 건 무슨 뜻인가.
―만약 대선후보가 손학규 상임고문이었다면 이겼을까.
“친노 패권주의가 당을 지배하고 있고, ‘국민 참여’라는 미명 아래 모바일투표라는 친노에 절대 유리한 룰로 경선이 치러졌는데 가능했겠나. 그것 말고도 손 고문은 절대 대선후보가 될 수 없는 운명이었다. 소위 ‘변절’(한나라당 출신) 때문이다.”
―친노 패권주의란 언급을 했다. 그러나 친노로 지목되는 이들은 ‘친노는 없다’라고 하는데….
“궤변이다. 민주당엔 당 운영, 공천권을 장악해 온 실권 세력이 있다. 바로 주류인 친노다. 자꾸 ‘친노의 실체는 없다’라고 하는 건 눈 가리고 아웅 하는 것이다. 과반이 넘는 국민이 정권 교체를 원했고, ‘이길 수 있다’라고 자신했는데 졌다면 정치적 책임을 져야 한다. 민주당에 기대를 걸고 5년 후엔 정권을 되찾아야 한다고 믿는 48%의 국민에게 책임을 지는 정치적 행동을 보여 줘야 한다. 민심과 괴리된 패권주의는 도전받고 무너져야 한다.”
―친노 패권주의를 비판하는 비주류의 목소리는 높지만 파장은 크지 않은데….
“목소리만 컸지 의사 결정 과정에 반영되지 못하니까…. 친노란 주류가 공천권 같은 권력을 순순히 내놓을 리가 없기 때문에 비주류는 공개적으로 국민의 힘을 빌려 노선 투쟁을 치열하게 전개해야 한다. 담대하게 국민을 믿고 당내 권력을 교체해야 한다. 이해찬-박지원 담합 체제도 완전히 깨야 한다. 그래야 민주당의 미래가 담보될 수 있다.”
―비주류는 수도 적고 인물도 마땅치 않은데….
“DJ-YS(김영삼 전 대통령)가 ‘40대 기수론’을 외쳤을 때(1970년대 신한민주당)를 생각해 보라. 당시 유진산이라는 노회하고 막강한 당수가 있었지만 DJ와 YS는 비전을 제시하고 투쟁해 국민의 지지를 이끌어 냈다. 국민의 검증이 끝났는데도 기득권을 놓지 않으려 퇴장을 거부하는 친노들과 당시 ‘구상유취(口尙乳臭)’ 운운한 유진산이 뭐가 다른가. 국민과 역사를 보고 가야 한다.”
―햇수로 치면 4년 뒤에 또다시 대선이다. 민주당은 집권할 수 있을까.
“지금은 ‘멘붕(멘털 붕괴)’ 상태지만 2017년 대선 전망은 어둡지 않다. 안으로는 안희정(충남도지사), 송영길(인천시장)이 있고, 야권 전체로 시야를 넓혀 보면 안철수(전 무소속 대선후보), 박원순(서울시장)이 있다. 반면 여권에는 ‘포스트 박근혜’가 마땅치 않다. 박 당선인만 해도 15년이나 신산(辛酸)의 과정을 거치면서 ‘선거의 여왕’이란 명예로운 호칭을 얻었다. 친노 패권주의를 끝내고, 세대교체를 이뤄 내고, 온건하고 합리적인 중도 자유주의 노선을 토대로 생활정치에 입각한 정책을 발굴하고, 책임정치를 구현하고 김용민(‘나는 꼼수다’ 멤버) 이정희(통합진보당 전 대선후보) 같은 사람들을 물리치고, 진보와 보수, 좌와 우를 떠나 품격을 갖춰 경쟁하고 정책으로 승부하면 집권할 것이다. 포텐셜(잠재력)은 민주당이 새누리당보다 훨씬 좋으니까.”
―이정희 전 후보 얘기가 나왔으니 묻겠다. 통합진보당은 진보정당인가.
“진보라는 용어를 가질 수 있는 세력이 전혀 못 된다. 민족주의의 이름을 빌려 주체사상,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신봉하고 있는 정당이 어떻게 진보정당인가. 반동 중의 반동이다. 종북(從北) 의혹은 제도권 정당으로서 치명적인 결격 사유다. 많은 국민이 북한을 도와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김일성-김정일 노선을 추종하는 것과는 전혀 별개다. 그런데도 민주당은 이런 정당과 연대했다. ‘정권 교체가 최선’이라는 판단 착오, 집단사고의 함정에서 기인한 것이다. 이정희도 민주당이 ‘연대’니, ‘연합’이니 외쳐서 스타가 된 사람이다. 민주당은 진보의 이름을 참칭해 종북, 마르크스주의를 추종하는 세력과는 선명하게, 완벽하게 결별해야 한다.”
▶ [채널A 영상] 민영삼 “문재인, 의원직 사퇴해야”
김기용 기자 kk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