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실의 혼례식 풍경/신병주 박례경 송지원 이은주 지음/268쪽·2만2000원·돌베개
1844년 조선 헌종과 효정왕후의 경희궁 혼례 장면을 그린 ‘헌종효정왕후가례병풍’. 가례를 8폭 병풍에 담은 건 이것이 유일하다. 동아대 박물관 소장. 돌베개 제공
한반도 ‘로열패밀리’의 결혼도 이에 못지않았으리라. ‘왕실의 혼례식 풍경’은 조선시대 왕과 세자, 세손의 가례(嘉禮·왕실의 혼례)에 큼지막한 돋보기를 들이댄 책이다. 가례도감의궤나 국조오례의 등을 샅샅이 뒤져 결혼이 진행되는 절차나 과정을 빠짐없이 전달한다. 조선 궁중의 웨딩마치는 그림이나 문서 자료가 상당해 당시 분위기나 전후 사정을 꽤 구체적으로 체감할 수 있다.
‘왕실의…’는 무엇보다 신병주 건국대 교수를 비롯해 여러 학자들이 대거 참여해 조선의 가례를 입체적으로 들여다보게 만든다. 중국 주나라 때부터 이어진 동북아시아 혼례 의식이 한반도에서 어떻게 정착 발전하는지, 같은 조선시대라도 시기나 지위에 따라 규모나 절차가 어떻게 다른지를 일러준다. 복식사(史)에 정통한 이은주 안동대 교수가 주 집필한 결혼 당사자와 하객들의 복장이나 머리 모양 얘기도 눈길을 끈다.
사료에 근거한 학술서이긴 해도 구석구석 숨겨진 뒷얘기도 적지 않다. 사치에 질색했던 영조가 1704년 숙종의 제4왕자로서 정성왕후와 맺어진 혼인은 “법도를 넘어 비용이 만금(萬金)을 헤아릴 정도였다”(숙종실록)고 한다. 아마도 이때의 기억이 영조가 이후 허례허식을 지양하는 계기가 됐을지도 모른다. 정성왕후가 세상을 떠난 뒤 3년 상을 치른 영조는 1759년 66세에 신하들의 간청을 못 이겨 15세 꽃다운 처녀 정순왕후를 아내로 맞이한다. 영조는 원래 성정도 그러했지만 계면쩍었던지, 연상(宴床·잔칫상)이나 준화(樽花·국가 행사에 쓰던 조화) 등을 죄다 치우라고 명했다. 영조가 승하한 뒤 정순왕후가 끝없이 권력욕을 불태웠던 건 그런 결핍의 나비효과는 아니었을까. 행간(行間)에 잠깐씩 멈춰 ‘상상의 날개’를 펼쳐보는 맛이 있다.
다만 글이 살짝 딱딱하다. 한자 많은 거야 어쩔 수 없더라도, 몇몇 장(章)은 문장이 너무 길고 고풍스럽다. 학술대회에 발표한 논문을 읽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 교수님들, 배움 짧은 우리네 처지도 좀 헤아려 주세요.
정양환 기자 ra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