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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대공감 Harmony]비바람 먹은 나무 뚝딱… 엄마와 아들은 사랑을 창조했다

입력 | 2013-01-21 03:00:00

황금자·이현우 모자의 ‘세대공감’ 가구 만들기




지난달 10일 충북 제천의 한 목공소에서 황금자 이현우 모자가 직접 만든 상을 살펴보고 있다. 황씨 모자는 함께 상을 만들며 그간 못했던 이야기를 나눴다. 변영욱기자 cut@donga.com 

엄마와 함께 나무를 보던 이 군이 입을 열었다. “나무들이 다 못 생겼구먼. 이걸로 어떻게 상을 만들어.” 애써 숨기려 했지만 방학 중에 엄마와 먼지 가득한 목공소를 찾은 게 영 못마땅한 눈치다. 제천중학교 3학년인 이 군은 당연히 엄마와 있는 것보다 친구들과 노는 게 더 즐겁다. 이날도 친구들과 함께 노래방에 갈 계획이었다.

함께 나무를 살피던 황 씨는 아들의 푸념에 “이게 진짜 나무야. 도끼질 외에는 아무런 가공도 하지 않은 진짜 나무”라고 했다.

박 목수가 옆에서 거든다. “이 나무는 잘려있지만 살아있는 나무야. 비 오면 비 맞고, 바람 불면 바람 맞고 5년을 버틴 나무지. 사람도 못 하는 일을 한 대단한 나무라고. 허허.”

모자(母子)와 함께 신중하게 나무를 고르던 박 씨는 작업장 뒤편에서 먼지를 뒤집어쓴 채 홀로 있던 나무를 휙 집어 들었다. 얼룩덜룩한 깜장이 묻어있는 나무다. “오늘은 이걸로 만듭시다. 이게 제일 낫겠네요.”

엄마가 아들에게 말했다. “요즘 우리 가족끼리 함께하는 시간이 부쩍 줄었잖아. 상이 있으면 같이 과일도 먹고 이야기도 할 수 있대. 이거, 꼭 아들이랑 만들고 싶었어. 투덜대지 말고 엄마랑 같이 만들자. 응?” 바지 주머니에 손을 푹 찔러 넣은 채 애꿎은 바닥만 차고 있던 이 군은 말없이 입을 삐쭉댔다.

황 씨 모자가 박인규 목수로부터 좋은 나무 고르는 법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다.

○ 가족성 회복의 매개, 상(床)


황 씨는 제천에서 지역 문화재와 유물을 소개하는 문화해설사로 일하고 있다. 황 씨는 “문화해설사로 일하다가 우연히 박 목수가 하는 전시회를 알게 됐어요. 상과 찻상이 전부인 전시회였지만 무언가 ‘따뜻하다’는 느낌이 들더라고요. 애들 어릴 때 상을 놓고 둘러앉아 밥을 먹던 모습이 떠오르기도 했고요”라고 말했다.

황 씨 모자의 대화가 줄어든 건 이 군이 사춘기에 접어들면서부터다. 황 씨 부부가 맞벌이를 하며 정신없이 사는 동안 이 군은 훌쩍 자랐다. 엄마보다 친구에게 털어놓는 비밀이 많아졌고 가끔씩은 친구 집에서 ‘외박’을 하기도 했다.

자녀를 키우며 응당 겪어야 할 일이지만 엄마는 아들과 멀어진 게 못내 아쉽다. 이 군이 잠시 화장실에 간 사이 황 씨가 속내를 털어놨다. “요즘 아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지 궁금해 아들 카카오스토리에 한번 들어가 봤어요. 그랬더니 친구나 여자친구 이야기만 가득하더라고요. 엄마에 대한 이야기는 결국 못 찾았죠.”

황 씨는 그때부터 아들과 함께 박 목수의 작업장에서 상을 만드는 꿈을 꿨다. 가족이 함께 두고 사용할 물건을 아들과 함께 만들며 소통하고 싶었다. 박 목수도 흔쾌히 승낙했다. 황 씨가 자신이 만드는 상의 의미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박 목수는 상이 파편화된 현대 사회의 가족을 접합시킬 수 있는 가교라 주장한다. 예전엔 가족이 같은 시간에 상을 가운데 두고 밥을 먹거나 차를 마시며 시간을 보냈지만 집 안에서 상이 사라지며 가족의 대화도 단절됐다는 것이다.

바쁜 현대사회에서 상을 대신한 건 식탁이다. 상을 차리고 치우는 시간은 훨씬 짧아졌지만 식탁은 상을 온전히 대체하지 못했다. 식탁은 직장과 학교, 학원에서 온통 시간을 보내는 가족 구성원이 급하게 들러 ‘끼니’를 때우는 집 안의 섬이다. 뚜껑만 연 채 놓은 반찬통 몇 개를 두고 급하게 밥을 먹는 풍경은 우리에게 낯설지 않다.

박 목수는 황 씨 모자가 상을 만들 수 있도록 공구를 준비하며 입을 열었다. “요즘 가족의 모습을 한번 찬찬히 살펴보세요. 식탁에서 오랫동안 앉아 있는 가족이 없습니다. 식탁에서 밥을 먹곤 바로 소파로 가죠. 소파에 앉아선 또 어떻습니까. 가족이 서로의 얼굴은 보지 않고 전부 TV만 보고 있죠.”

소파에서 가족이 나눌 수 있는 대화도 한정적이라는 게 그의 설명. 한참을 TV만 보다 밥 때가 되면 “밥 줘”, 잘 시간이 되면 “불 끄자”가 대화의 전부라는 것이다.

상을 두고 앉으면 가부좌를 하게 돼 몸가짐이 가지런해지고 마음까지 단정해진다는 건 박 목수가 주장하는 ‘상론(床論)’의 핵심이다. “식탁에 앉으면 허리 아래가 가려져 안 보이죠. 그러면 사람은 자신의 몸 전체가 가려졌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러니 어른들과 앉아도 자세가 흐트러지는 것이죠. 이런 면에서 상은 가족의 화합을 도모하고 부모와 자녀 사이의 질서를 세울 수 있는 매개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나무의 겉 표면을 매끄럽게 하는 샌딩작업. 황씨 모자는 긴 시간이 걸리는 샌딩작업을 하며많은 대화를 나눴다. 변영욱기자 cut@donga.com

○ 상을 만드는 건 나무와 소통하는 일


나무와 공구가 준비됐다. 황 씨와 이 군은 각자 손에 장갑을 낀 채 작업대 앞에 섰다. 박 목수도 옆에서 작업 준비를 마쳤다. 우선 고른 나무를 원하는 크기에 맞게 잘라야 한다. 황 씨 모자가 나무의 양쪽 끝을 잡고, 박 목수가 전기톱을 이용해 약 150cm 길이로 나무를 잘랐다. 폭은 길이에 맞게 약 16대 9의 비율로 맞추면 된다.

다음은 나무의 표면을 깎아 뽀얀 속살을 드러내는 작업이다. 박 목수는 5년간 양달과 응달을 오가며 자연 건조시킨 나무만 쓴다. 나무의 성질은 좋아지지만 겉엔 시간의 때가 켜켜이 쌓여 있다. 황 씨 모자는 대패를 이용해 나무의 낡은 옷을 함께 벗겼다.

“엄마. 나무에 이상한 얼룩이 있는데?” 대패질을 하던 이 군이 엄마에게 말을 건넸다. 나무 몸통에서 가지가 죽어 나간 흔적인 ‘옹이’를 일컫는 것이었다.

박 목수는 “보통 가구점에선 옹이를 흠으로 보는데 옹이도 나무가 살았던 흔적 중의 하나예요. 예쁜 옹이를 찾았으면 거기서 대패질을 멈추고 샌딩을 시작해도 됩니다”라고 조언했다.

‘윙윙’ 나무를 매끄럽게 다듬는 샌딩이 시작됐다. 샌딩은 4번에 걸쳐 진행된다. 그만큼 시간도 오래 걸린다. 황 씨 모자는 샌딩기계를 들고 나란히 섰다. 그리곤 천천히 나무를 매만지기 시작했다. 박 목수의 표현을 빌리자면 샌딩은 “나무가 아기 피부처럼 부드러울 때”까지 해야 한다.

샌딩을 하는 황 씨 모자의 모습은 마치 벼루에 먹을 가는 문인 같았다. 모자는 말이 없고 오직 샌딩기계 소리만이 조용히 작업실을 채웠다.

엄마가 분위기를 바꿔보려 말을 꺼냈다. “아들.” 이 군이 답했다. “응?” “엄마 전에 너 카스(카카오스토리의 준말) 들어가 봤어. 어떻게 여자친구 이야기는 있는데 엄마 말은 한 줄도 없니?”

엄마가 투정부리듯 던진 말에 이 군의 얼굴이 빨개졌다. “아니…뭐, 엄마야 매일 보니까…” 잠깐의 침묵이 흐르고, 엄마가 입을 뗐다. “엄마는 네가 집에만 들어오면 방문 닫고 자기 방으로 들어갈 때마다 참 서운했어. 그게 그동안 일하느라 많이 못 챙겨준 내 잘못인가 싶기도 했고. 그래도 엄마가 아기 때부터 너 참 예뻐했던 거 알지?” 황 씨의 말을 듣던 이 군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박 목수가 황 씨 모자에게 말했다. “이 상 다 만들고 집에 가면 아마 오며가며 상을 계속 쓰다듬게 될 거예요. 만들 때의 기억과 직접 만들었다는 경험이 상에 대한 애착으로 변하는 것이죠. 지금처럼 천천히 샌딩을 하며 무생물인 나무와 교감하고 나면 사람과 소통하는 건 아무것도 아니에요. 오늘부터 상을 공통 화제로 놓고 서로 대화도 늘어날 겁니다.”

오전 10시에 시작한 작업은 오후 3시가 넘어서 끝이 났다. 엄마와 아들이 함께 만든 상은 투박했다. 가구점에서 직접 산 것처럼 매끄럽진 않아도 어딘지 모르게 시선을 끄는 형태였다. “잘 만들어졌네요. 허허.” 박 목수가 껄껄 웃으며 칭찬의 말을 건넸다. 황 씨가 아들의 등을 톡톡 토닥였다. “아들 오늘 시간 내줘서 고마워.” 아들이 답했다. “뭘, 그래도 재미는 있던데.” 그리고, 이 군은 이날 처음으로 미소를 보였다.

송충현 기자 balgu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