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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대공감 Harmony]생활의 탄탄함 녹아든 북유럽가구, 그 낡음의 아름다움

입력 | 2013-01-21 03:00:00

안지훈 브랜드매니저 기고




필자의 집에 있는 덴마크산 서랍장. 이 서랍장처럼 모든 북유럽 가구에는 다리가 달려있다.눈비가 많이 내려 습해지는 겨울 기후 때문이다. 안지훈 씨 제공

필자에겐 1960년대에 만들어진 덴마크산 책상과 서랍장, 의자들이 있다. 그 재료는 티크와 로즈우드(rosewood·자단)다. 접착제를 쓰지 않고 짜맞춤 기법이나 나무못을 이용해 만든 것들인데, 덴마크 가정에서 실제로 썼던 평범한 가구들이다.

필자가 집에서 쓰고 있는 덴마크산 책상. 원재료의 고운 색깔에 사람의 손길이 만들어준 파티나(patina)가 더해져 아름다운 광택을 낸다. 안지훈 씨 제공

꽤 오래됐지만, 이 가구들에는 여러 가지 좋은 점들이 있다. 우선 어른 두 사람이 가볍게 들어 옮길 정도로 무게가 적당하다. 상태도 완벽하다. 가구를 지탱하는 다리에서 하루에도 몇 번씩 열고 닫는 서랍까지 어느 것 하나 틀어지거나 떨어진 데가 없다. 네모반듯하게 만들어져 좁은 공간에서도 자리를 많이 차지하지 않는다. 워낙 장식이 없는 단순한 형태이기 때문에 주위 물건들과의 조화도 나쁘지 않다. 게다가 원재료의 고운 색깔에 사람의 손길이 만들어준 파티나(patina)가 더해져 아름다운 천연의 광택을 낸다.

필자는 오랫동안 이 가구들을 사용하면서 자연스레 북유럽 빈티지 가구의 팬이 돼 버렸다. 앞으로도 수십 년은 문제없이 쓸 수 있는 튼튼한 물건을 보며 북유럽 사람들의 정직함과 섬세함을 깨달았다.

핀란드 헬싱키 공항 라운지의 테이블과 의자들. 단순한 조형미를 강조하는 북유럽 가구의 특징이 잘 나타나 있다. 알바르 알토가 디자인했다. 안지훈 씨 제공

○ 노동 중산층을 위한 가구


북유럽 가구를 특징짓는 중요한 요소 중 첫 번째는 바로 기능성이다.

스칸디나비아 가구는 감상이나 공간의 장식보다는 실생활 속에서의 쓰임을 염두에 두고 고안, 제작돼 왔다. 소박하고 단순한 디자인은 이미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잘 알려진 특징이다. 가구들이 주로 네모반듯한 형태란 점 역시 공간 활용을 염두에 둔 것이다.

최근의 디자이너들은 다양한 소재로 새로운 시도를 하고 있지만, 북유럽 가구의 전통적 소재는 남미에서 수입한 티크와 로즈우드다. 무늬가 고운 브라질산 로즈우드는 상대적으로 고급 가구에 많이 사용됐다. 가장 널리 쓰인 재료는 티크로 1980년대 이전에 만들어진 북유럽 가구의 90% 이상이 티크를 재료로 했다. 티크는 단단하고 관리가 쉬운 데다 가격도 비교적 싼 편이라 인기를 끌었다.

깔끔한 느낌이 나는 헬싱키 공항 라운지의 모습.

북유럽 가구의 또 다른 특징은 가구의 아래쪽 면이 바닥에 닿는 경우가 거의 없다는 점이다. 책상은 물론이고 옷장, 서랍장, 책장에도 다리가 달려 바닥 면과 거리를 유지하고 있다.

그 이유는 북유럽의 자연환경에서 찾을 수 있다. 긴 겨울 동안 눈과 비가 많이 내리고 습도의 변동이 심한 북유럽에선 가구의 나무가 젖거나 뒤틀리는 것을 막을 필요가 있다. 이는 결과적으로 북유럽 가구 고유의 디자인적 특징이 됐다.

가구를 포함한 북유럽 디자인을 다루며 빼놓을 수 없는 게 스웨덴에서 시작된 디자인 부흥운동이다. 스웨덴은 노동자의 나라다. 사회민주주의를 내세운 스웨덴 정부는 1930년대부터 디자인을 통해 국민들의 삶의 질을 향상시킬 수 있다고 믿었다. 여기서 이야기하는 국민은 바로 산업국가인 스웨덴을 이끌던 노동자들이다. 당시 스웨덴의 국가적 목표는 중산층 노동자층을 만드는 것이었다.

예술적인 측면에만 그치는 게 아닌, 실생활에서 국민에게 도움을 주자는 적극적이고 지속적인 캠페인들이 국가와 언론, 지방자치단체를 통해 진행됐다. 좋은 디자인 제품의 예가 책자나 신문으로 인쇄돼 배포됐다. 노동자 가정을 위한 가구들이 특별히 디자인되기도 했다. 한결같이 기능성을 강조한 것들이었다.

특히 가구는 특별히 고급 목재를 쓰지도 않았고, 매뉴얼과 규격화를 통해 공장 생산이 가능하도록 했다.

스웨덴 사람들은 숙련된 장인이 직접 만든 것과 비교해도 뒤떨어지지 않는 고품질의 가구를 공장에서 생산할 수 있다면, 더 많은 사람들이 경제적 부담 없이 좋은 제품을 쓸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세계적인 가구 브랜드인 이케아(IKEA) 또한 이러한 생각에 힘입어 세계적인 기업으로 성장했다.

북유럽의 중심국가였던 스웨덴에서 시작된 이런 움직임과 생각은 주변 나라들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북유럽 사람들은 이것을 ‘디자인 민주주의’라 부르기도 하는데, 경제적·사회적 위치에 상관없이 국민이라면 누구나 좋은 디자인을 느끼고 소유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 주인과 함께 늙어가는 가구

덴마크 오르후스 시청 안의 나무 벤치.

북유럽 가구의 대표주자는 두말 할 필요 없이 덴마크다. 디자인에 약간의 관심만 가지고 있다면 아르네 야콥센(Arne Jacobsen·1902∼1971)이나 한스 웨그너(Hans Wegner·1914∼2007), 핀 율(Finn Juhl·1912∼1989) 같은 이름들이 익숙할 것이다. 지난해 가을 서울 대림미술관에서 열렸던 핀 율 특별전은 연장 전시를 할 정도로 성황을 이뤘다. 동시대에 활동했던 이 가구 디자이너들은 모두 전통가구의 디자인에서 벗어나 새로운 덴마크 스타일을 만들어낸 것으로 평가받는다.

덴마크 디자인이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데에는 덴마크 정부의 역할이 컸다. 남한보다 작은 덴마크에는 500만 명이 조금 넘는 사람들이 산다. 내수시장의 국가경제 기여도가 지극히 낮을 수밖에 없다. 생필품도 아닌 가구나 디자인 산업의 경우라면 적은 수요가 문제가 될 수밖에 없다.

덴마크인들이 택한 것은 바로 수출이었다. 20세기 초까지만 해도 덴마크 디자인은 스웨덴의 그것보다 한 수 아래로 평가받았다. 하지만 20세기 중반, 해외 시장에서의 인지도 상승을 무기로 상황을 역전시켰다. 가까운 유럽대륙이나 멀리 미국으로 팔려나간 덴마크 가구들은 그곳 사람들의 마음을 빼앗았다.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했던 단순하고 쉬운 디자인은 충격에 가까웠다. 소재와 구조의 특성상 이동이 쉽고 내구성까지 높았다. 사람들은 열광했다.

이때부터 덴마크 가구가 북유럽을 대표하기 시작했다. 재미있는 것은 요즘엔 미국 같은 곳에서 덴마크 빈티지 가구들이 ‘고향’으로 역수입되고 있다는 점이다.

북유럽 가구의 가장 큰 장점은 아무리 봐도 질리지 않을 뿐 아니라, 어디에 놓아두어도, 그리고 무엇과 같이 두어도 어색하게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러니 한 번 구입을 하면 오랫동안 함께할 수 있어 좋다. 주인과 그의 물건이 함께 늙어간다는 것은 참 아름다운 모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