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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필요한 검진-투약…“내몸은 좀비가 돼간다”

입력 | 2013-01-18 16:16:00

불안 조장 의료상술에 ‘돌직구’ 날린 김현정 의학박사




“겁나시지요? 검사받으세요, 수술받으세요, 새로 나온 신약이에요, 외국에서 건너온 기가 막힌 제품이에요. 걱정되시죠? 보험에 드세요, 아주 쌉니다, 동이 나기 전에 어서 사세요….”

최근 발간된 책 ‘의사는 수술받지 않는다’(느리게읽기)에 실린 시니컬한 한 구절이다. 사뭇 도발적인 제목에서 엿볼 수 있듯, 이 책은 약 처방과 각종 검사 및 수술, 의료정보의 과잉이 판치는 우리 의료계 현실에 ‘돌직구’를 날린다. 저자는 뜻밖에도 현직 의사. 서울특별시 동부병원 정형외과 김현정(46·의학박사) 전문의가 그 주인공이다.

상당수 병·의원의 과잉진료와 환자들의 의료쇼핑이 혼재하는 의료계의 ‘불편한 진실’을 내부자 처지에서 드러내긴 쉽지 않았을 터. 이에 대해 김 박사는 “근사하고 달콤하게 포장한 불안을 권하며 호시탐탐 의료상술을 일삼는 우리 주위 악당들에게 카운터펀치를 먹이고 싶었다”고 말한다.

김 박사는 그 한 예로, 우리 의료계가 불필요한 검사와 처방을 남용하는데도 정작 의사들은 일반인에 비해 건강검진을 받는 비율이 낮다는 점을 꼽는다. 또 인공관절이나 척추, 백내장, 스텐트(stent·혈관 폐색 등을 막으려고 혈관에 주입하는 장치), 임플란트 등 비교적 흔한 수술을 받는 비율도 현저히 떨어지고, 심지어 항암치료 참여율조차 낮다고 털어놓는다.

불필요한 검사와 처방 남용


“정형외과 의사들끼리 밥 먹으면서 곧잘 하는 얘기가 있어요. 되도록 세 가지를 받지 말자. 건강검진, 척추수술, 어깨수술. 물론 지금 말하는 건강검진은 의무적인 검진이 아니라 평소 건강관리를 위해 받는 자발적 검진을 말합니다.”

환자를 직접 수술하고 약 처방을 내리는 의사들이 막상 자신이 아플 땐 유독 그것을 꺼리는 까닭은 뭘까. 김 박사의 비유대로 표현하자면, ‘마치 손님들에겐 매일 기름진 진수성찬을 차려내는 일급 요리사가 정작 자신은 풀만 먹고 사는’ 격인데 말이다.

“누구보다도 의료 허상을 잘 알기 때문이죠. 그 어떤 의료행위든 양날의 칼과 같습니다. ‘모든 약은 독이다. 다만 그 용량에 따라 약이 되기도 하고 독이 되기도 한다’는 16세기 의화학(醫化學)의 시조 파라셀수스의 말도 있듯, 의료도 ‘혜택’과 ‘한계’라는 양면을 지니고 있음을 아는 거죠. 그래서 부작용을 우려해 장기 복용해야 하는 약과 수술, 검사 등에 섣불리 의사 본인과 자기 가족의 몸을 맡기지 않고 버티는 선택을 하는 경우가 제 주변에도 많습니다.”

한마디로, 의료엔 정답이 없는 사례가 많기 때문에 의사들은 자신에 대한 처방에선 환자를 상대로 할 때보다 훨씬 자유로울 수 있다는 것. 그렇다면 적지 않은 수의 의사가 환자에 대해 과잉진료를 하는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연이어 쏟아지는 새로운 약물과 의료장비에 대한 임상·연구 실적을 쌓으려는 의사 개개인의 성과주의와 명예욕도 한 원인이고, 수시로 달라지는 정부의 진료지침, 학회의 권장 가이드, 병원 경영지침, 보험사 수급 기준 등에 따른 외부 압력도 의료 공급과잉을 낳는 무리한 처방의 배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의사는 수술받지 않는다’에 실린 삽화 중 일부.

사정이 이렇다 보니 ‘이가 아프면 갈아 끼면 되고(임플란트), 다리 아파도 갈아 끼면 되고(인공관절), 심장 아프면 또 갈아 끼면 되고(스텐트), 생각대로 하면 되는’, 즉 ‘자연산’ 몸의 자연치유력보다 인공물에 의존하려는 의료과잉이 심화된다는 게 김 박사의 견해다.

그는 전 국민적 ‘의과대학생 증후군’도 의료과잉을 부채질한다고 지적한다. 피곤해서 눈썹이 씰룩이면 루게릭병은 아닌지, 입이 마르면 당뇨는 아닌지, 손가락이 뻑뻑하면 류머티즘은 아닌지 불안에 떨다 보니 갈수록 첨단 의료정보만 좇고 좀 더 현명한 의료소비를 선택하기는 점점 어려워진다는 것이다.

이러한 왜곡된 현상을 해결하려고 김 박사가 제시하는 해법은 이른바 0차 의료. 0차 의료라는 용어는 1, 2, 3차 의료기관으로 구분 짓는 현행 의료전달체계의 의료기관 분류에서 착안한 것. 이들 의료기관을 찾기 전 환자 개개인이 자기 몸 주인으로서, 의료 주체로서 자신의 힘과 기능을 찾고 키우는 것을 0순위로 삼자는 의미를 담았다.

0차 의료의 7가지 해법은 △마음의 힘 키우기 △몸 많이 움직이기 △인공에 반대하기 △경증에 지혜롭게 대처하기 △미니멀리즘 의료 실천하기 △보험 남용하지 않기 △느리게 살기 등이다. 즉, 환자가 먼저 의료 주체임을 새롭게 자각해 시간이 다소 걸리더라도 몸의 자연치유력을 믿고 의료과잉을 경계하는 동시에 ‘소소익선(少少益善)’하는 최소한의 치료방법을 선택하라는 것이다.

그렇더라도 당장 병이 낫길 바라는 환자 처지에선 의사 처방에 따를 수밖에 없지 않을까. 치료방법 선택을 놓고 비전문가와 의료인 간 접점을 찾기란 생각만큼 쉽지 않은 하나의 딜레마일 수밖에 없다. 이에 대한 김 박사의 답변은 이렇다.

“병을 치료하는 건 에베레스트를 오르는 것과도 같아요. A코스, B코스, C코스… 코스가 많죠. 하지만 결국 산을 오르는 건 환자 본인입니다. 의사는 성공적인 등반을 돕는 셰르파죠. 요즘 환자들이 스마트해져서 환자와 의사 간 의료정보의 비대칭이 많이 해소됐어요. 의료 기본이 환자로부터 시작되는 만큼, 등반가인 환자 스스로 셰르파인 의사에게 적극적으로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에베레스트 등반엔 엘리베이터가 없거든요.”

의사는 등반 돕는 셰르파 구실

김 박사는 1997년 연세대 의대가 배출한 첫 여성 정형외과 전문의이자, 대한민국 1호 정형외과 분야 여성 대학교수(아주대 의대)다. 하지만 2005년 새로운 경험을 쌓으려 교수직을 내던지고 2007년 미국으로 건너가 인도 고대의학인 아유르베다를 배웠다. 2008년부터 3년간은 한국화이자제약 의학부장, 존슨앤드존슨메디컬 드퓌사업부 아태총괄 의학감독으로도 일했다. 이는 다른 관점, 다른 각도에서 의료계를 속속들이 보고 싶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현재는 진료현장을 누비는 일 외에도 의료의 진정성과 건전성 회복을 위한 비영리단체 ‘포럼 제로(Forum Zero)’를 결성해 활동 중이다.

이번 책은 김 박사의 처녀작. 그는 지난해 4월 탈고한 뒤 출판사 20여 곳에 원고를 보냈지만, 대부분 수지가 맞지 않는다며 출간을 거절하거나 대폭적인 내용 수정을 요구하자 아예 같은 해 10월 직접 출판사를 차려 책을 펴냈다. 그래서 지은이도, 펴낸이도 김현정이다. 책에 실린 아마추어 냄새 물씬한 정감어린 삽화도 그의 작품이다. 책이 나온 후 동료 의사들의 반응은 “내용에 크게 공감한다” “우리도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다”가 주류였다고 한다.

평소 건강하게 보이던 황수관 박사가 갑자기 유명을 달리해서인지 새해 벽두부터 건강에 대한 세인의 관심이 더 커진 듯하다. 김 박사의 책 목차에서 일말의 해답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그만 불안해하고 이제 느리게 살아’ ‘우리가 원하는 것은 생존이 아니라 삶이다’.
 
김진수 기자 jocke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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