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인준 주필
사정이 이러니 박 당선인과 새누리당 갈 길이 바쁘다. 그렇다고 조급증에 빠지거나 정책과 변화가 ‘부실 날림’에 그친다면 민심을 더 잃기 쉽다. 박 당선인이 아무리 자기책임의식이 강하다 해도 혼자 또는 극소수 이너서클의 지혜·능력·시간만으로 할 수 있는 일에는 한계가 있을 것이다. 외곬으로 빠져 길을 잃을 우려도 없지 않다. ‘시대 교체’를 다수 국민이 인정할 만큼 긍정적인 변화를 단기간에 이루려면 정권집단 전체가 최적의 가동상태여야 한다. 새누리당이 신발 끈을 다시 매고 쉼없이 뛰어야 할 절실한 이유다.
지난해 12월 19일 대선 직후 새누리당 일부 인사들의 잠적극(潛跡劇)에는 양면성이 있다. 박 당선인을 편하게 해주겠다는 선의가 앞면이고, 자신의 정치인으로서의 주체성까지도 박 당선인에게 내맡기는 종속성이 뒷면이다. 당선인이 정권 인수를 할 동안 여당이 호흡조절을 할 수는 있다. 하지만 진정 책임감 있는 여당 정치인들이라면 당선인 몫과는 별개로 자신들 앞에 놓인 무겁고 시급한 숙제들에 태클해야 한다.
2016년 4월에는 20대 국회의원 총선거가 있다. 3년여 남았지만 어영부영 보내면 금세 닥치고 만다. 새누리당은 지난해 4월 19대 총선에서 뜻밖에 승리했다. 민주통합당 졸전(拙戰)의 반사이익이 컸다. 박근혜 비상대책위원장이 진두지휘하면서 ‘이명박 심판론’을 비켜가는 데도 성공했다. 그러나 3년 뒤 총선에서까지 요행과 어부지리를 기대할 수는 없다. 20대 총선에서 패배하면 그 순간 ‘박근혜 새누리당 정권’이 무력화된다고 봐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대통령 레임덕은 두말할 것도 없다.
박 당선인과 새누리당은 지난달 대선을 앞두고 각종 선거의 공천권을 국민에게 돌려주겠다고 약속했다. 내년 지방선거가 첫 시험대가 되겠지만 300명의 국회의원을 뽑는 총선이야말로 공천개혁의 성패를 가를 것이다. 공천권을 국민에게 돌려주는 제도 개혁 하나만도 만만찮은 과제다. 미리미리 하지 않으면 엉망진창이 될 우려도 있다.
박 당선인과 새누리당이 지난해 총선과 대선 때 국민 앞에 거듭거듭 약속한 ‘많은 변화’는 대부분 국회 입법을 통해 실행된다. 새누리당이 일일이 박 당선인의 고-스톱 신호에 따라 움직인다면 의회민주주의와 정당정치의 왜소화를 심화시키고 말 것이다. 그런 여당이 정권 재창출의 역사를 계속 쓸 수 있겠는가.
18대 대통령이 선출된 지 한 달여밖에 안 됐는데 19대 대선 얘기를 꺼내는 게 성급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새누리당은 적어도 4년 11개월 뒤인 2017년 12월의 19대 대선까지는 시야에 두고 정치를 해야 할 것이다. 지금은 박 당선인에게 힘이 실릴 수밖에 없지만 새누리당 사람들은 당의 ‘또 다른 미래’를 생각하며 스스로 일어서야 한다. 박근혜라는 정치적 자산은 2007년 8월 한나라당 대선후보 경선에서 이명박 후보와 박빙의 승부를 벌이고, 또한 깨끗이 승복함으로써 5년 뒤를 시야에 넣을 수 있었다. 그리고 야권의 어느 누구도 1 대 1로 그를 뛰어넘는 인물이 없었기에 ‘박근혜 18대 대통령’이 가능했다.
새누리당의 겨울단잠이 너무 길어지는 것 같다. 잠에서 깨라. 그리고 당의 근육을 다시 키우라. 좀더 당당하고 강인해져라. 영혼 없는 정치인들이라면 누가 구해주겠는가.
배인준 주필 injoo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