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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고싶다, 키 때문에… 클수 있다면 노예라도 상관없다”

입력 | 2013-01-23 03:00:00

겨울방학 키와의 전쟁




누군가 다가온다. 등을 툭 친다. “야, 호빗(소설에 등장하는 난쟁이 종족의 이름)!”

순간 번쩍 눈을 뜬다. 이런 식으로 잠에서 깬 게 일주일 새 벌써 두 번째. 방학이지만 교실 안에 있는 꿈을 꾼다. 책상에 앉아 있으면 친구들은 매번 “솜털이 보송보송하다”며 머리를 쓰다듬는다. 여학생들이 보는 앞에서.

나는 이름이 없다. 그 대신 호빗으로 불린다. 하루에도 수십 번은 키가 3cm만 더 컸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낳아준 엄마를 습관처럼 원망한다.(최모 군·고1)

162cm 정도인 키 때문에 자살충동을 여러 번 느꼈다는 최 군에게 이번 겨울방학은 특별하다. 키가 클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하며 인터넷 카페에 가입했다. 이른바 ‘키 업(up)’ 카페. 작은 키 때문에 고민이 많은 10대들이 회원이다. 온라인에 수시로 대화창을 열고 이런저런 정보를 공유한다. 한 달에 한 번가량 오프라인 모임도 한다. 10대들이 구입하기에는 비싼, 키 크는 약이나 초유(初乳) 등을 번갈아 사 나눠 먹는다.

○ 겨울방학, 10대들은 키와의 전쟁

이는 최 군만의 얘기는 아니다. 겨울방학을 맞아 10대의 키 늘리기 열풍이 뜨겁다.

방학 기간 성장클리닉은 문전성시다. 서울의 A한방클리닉 원장은 “10대들이 많이 찾는 덕분에 3년 사이 회원이 급증했다”고 귀띔했다. 성장 맞춤운동을 전문으로 하는 B클리닉 상담사는 “몇 년 전만 해도 초등학생이 대부분이었지만 이젠 비율이 초등학생 반, 중고교생 반이다. 초등학생은 주로 부모 손에 이끌려 오지만 중고교생은 고민 끝에 직접 찾아오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서울 강남 일대를 중심으로 ‘성장 전문 트레이너’도 방학 특수를 누린다. 가격은 10회 100만 원가량. 적지 않은 금액인데도 예약이 넘친다고 한다.

신발 안에 넣는 ‘키 높이 깔창’도 불티나게 팔린다. 국내 한 대형 인터넷쇼핑몰에 따르면 주로 10대들이 이용한다는 깔창 판매량이 최근 5년 새 3배 이상 늘었다. 이화여대 앞 골목에서 신발가게를 운영하는 전원태 씨는 “특히 남자 청소년들에게 인기가 많다. 50명 중 40명은 깔창을 깐다고 보면 된다”고 했다.

○ 죽고 싶다, 키 때문에

열풍의 배경에는 10대의 ‘키 콤플렉스’가 있다. 이는 본보 취재진이 서울의 H, K고교 학생 377명(남 194명, 여 183명)을 설문조사한 결과를 통해서도 확인된다. 가장 큰 외모 콤플렉스로 62.6%가 ‘키’를 꼽았다. 이어 ‘몸무게’(13.8%), ‘눈, 코, 입’(9.8%), ‘얼굴 크기’(8.8%), ‘기타’(5%) 순이었다.

본인의 키가 불만스러우냐는 질문에는 70.0%가 ‘그렇다’고 했다. 키 때문에 학교에 가기 싫은 적이 있다는 학생은 29.2%, 부모가 원망스러운 적이 있다는 학생도 26%였다. 20명 가운데 1명은 키 때문에 자살충동까지 느꼈다고 했다.

최규식 군(고2)은 “키는 생김새, 성격 등과 달리 그 수치가 명확하다. 누가 잘났는지 기준으로 삼기 쉽다”고 했다. 명확한 걸 좋아하는, 요즘 아이들 스타일에 딱 들어맞는 기준이 키라는 설명이다.

키 크고 늘씬한 연예인을 닮고 싶은 ‘워너비 신드롬’도 키에 대한 집착을 부추기는 이유로 꼽혔다. 특히 스마트폰의 보급은 기존 인터넷, 각종 미디어에 더해 워너비 신드롬에 기름을 부은 것으로 지적된다.

‘몸짱 열풍’이 10대에까지 확산됐다는 분석도 나온다. 서울의 한 대학병원 교수는 “사실 키 고민을 가장 많이 하는 시점은 결혼 적령기이지만 요즘 아이들은 조숙해 고민을 앞당겨 하는 것일 수 있다”고 설명했다.

○ 키 콤플렉스에는 대화가 핵심

키 콤플렉스는 부작용으로 연결될 가능성이 크다. 본보 설문조사에서 ‘키와 왕따 사이에 상관관계가 있는 것 같다’고 답한 학생은 30%에 이르렀다. 신광철 서울공고 교감은 “키가 작으면 왕따, 나아가 학교폭력의 대상이 되기 쉽다”고 했다.

키 콤플렉스는 질병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서울의 여고 2년생 미현(가명) 양. 고등학생이 되고부터 하루 일과가 화장실에서 거울 보는 일로 시작됐다. 거울 앞에 선 키 152cm인 자신을 보면 가슴이 답답해졌다. 학교에선 친구들이 자신을 두고 수군거리는 것 같아 우울했다. 그러다 학업 의욕까지 잃었다. 결국 더는 두고 볼 수 없었던 부모는 미현 양을 데리고 병원에 갔다. 병원에서 내린 진단은 신체이형장애. 정상인데도 스스로의 외모를 혐오하는 일종의 외모강박증이란 얘기였다. 이로 인해 우울증과 대인기피 증세까지 있었다.

2004년 조선대 의대 소아과학교실 연구팀 발표에 따르면 자신의 키가 작다고 느끼는 청소년들은 그렇지 않은 청소년보다 우울증 증상이 눈에 띄게 컸다.

키 콤플렉스, 극복할 방법은 없을까. 일단은 대화치료가 핵심이다. 성격이 내성적이고 소심한 사람일수록 보통 외모 콤플렉스가 크다. 그렇게 커진 콤플렉스는 자신을 더욱 위축시킨다. 따라서 누군가가 하루에 30분 정도 차 마시는 시간을 가지면서 대화해 주는 것만으로도 치료에 도움을 준다.

자원봉사 같은 외부활동을 늘려주는 것도 좋다. 이 과정에서 심리치료와 약물치료를 꾸준히 병행하면 더 큰 효과를 볼 수 있다.

신진우 기자 niceshin@donga.com   
김장희 인턴기자 이화여대 국문과 4학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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