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정위기 겪은 유럽, 더 강력한 유로존으로 업그레이드 중
프랑수아 라슐린 프랑스 파리정치대학 경제학 교수가 지난해 12월 28일 프랑스 파리 ‘경제·사회·환경 자문위원회’ 사무실에서 산업혁명 시대의 사회 경제적 모델을 뛰어넘는 새로운 미래 건설이라는 화두를 던지고 있다. 프랑수아 라슐린 교수 제공
―유럽 재정위기는 끝났나. 프랑수아 올랑드 프랑스 대통령은 “위기는 지나갔다”라고 말했고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는 “끝났다고 하기엔 너무 이르다”라고 말했다.
“두 사람 모두 옳다. 정치적으로나 유럽연합(EU) 차원에서 봤을 때 이 문제는 해결되고 있다. 올랑드 대통령이 옳은 이유는 유럽이 대응 방법을 찾았고 올바른 조치를 취했기 때문이다. 유럽중앙은행(ECB)과 EU는 ‘그리스 스페인 등의 유로존 탈퇴가 불가피한 것이 아니냐’라는 관측이 부상하던 위기의 시점에 유로존의 존재와 지속성을 보장하기 위한 뜻을 확고하게 밝히고 그에 맞는 대책들을 내놓았다. 메르켈 총리의 말도 옳다. 현 단계가 정상적인 유로존 재건을 위한 초기 단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ECB의 유로존 내 대형 은행들에 대한 엄격한 감독, 은행 시스템 규제, 은행연합 추진 구체화 등 필수 불가결한 개혁 조치들이 이뤄졌다. 그런 점에서 나는 유로의 미래에 낙관적이다.”
―유로존 위기의 핵심인 이탈리아와 스페인 경제 문제는 어떻게 전망하나.
―아직 유로존 해체나 재구성이 유럽과 세계 경제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의견이 있는데….
“그건 유로존의 파국을 초래할 무책임한 얘기다. 그리스가 유로존에서 탈퇴한다고 당장 경쟁력이 생기겠는가. 나는 반대로 생각한다. 프랑스 등 다른 유럽 국가들도 마찬가지다. 위기에 처한 국가에 유로존은 ‘구속’이자 ‘책임’이다. 지금 위기를 겪는 국가들이 안정된 미래와 경쟁력 있는 경제 재건을 향해 나갈 수 있는 가장 큰 힘은 유로존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이탈리아 스페인 프랑스 역시 유럽과 유로존에 속해 있기 때문에 의무적으로 각종 문제점을 해결해야 했던 것이다.”
―유로존에 속한 덕분에 위기를 극복했다는 뜻인가.
“그렇다. 유로존이 없었다면 그리스 등은 끝없는 나락의 길에 빠졌을 것이다. 우리는 지금보다 더한 어려움이 닥칠 수 있다고 예측하지만 다른 이면은 보지 못한다. 우리가 유럽 시스템에 속해 있고 ECB가 금융 지원으로 올바른 개혁을 유도한 덕분에 문제가 발생한 당사국에 책임과 의무를 다하도록 관철하고 나아가 금융 시스템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할 수 있었던 것이다. 만약 프랑스 같은 나라가 유럽과 유로존에 속해 있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까. 끝없는 방임주의로 흘러 나태해지고 결국 쇠락의 길로 접어들었을 것이다. 이제 유로존은 선택의 여지가 없다. 유로존은 가능성을 겨냥해 출발한 것이지만 이제는 필연성으로 유지돼야 하며, 또 유지할 수밖에 없는 새로운 시점에 접어들었다.”
“유럽의 위기는 새로운 세상을 열었다. 흔히 믿음의 위기를 겪거나 감기 몸살에 걸렸다가 회복된 인간은 그 전의 상황으로 되돌아간다. ‘그동안 나빴지만 다시 괜찮아졌다’라는 것이다. 하지만 재정위기가 완전히 해결되면 이 또한 이전 상황으로 되돌아갈까. 나는 아니라고 본다. 우리는 완전히 다른 세상에 들어왔다. 지진이 발생하면 지표면에 대혼동이 일어난다. 집이 무너지고 땅이 갈라지고 도로가 끊긴다. 하지만 실제 지진은 내부의 지각변동 때문에 발생한다. 국내총생산의 90%가 넘는 엄청난 국가 부채, 0% 성장률, 살인적인 실업률 등 3가지가 유럽 재정위기의 지표면이다. 이를 깊이 파고 들어가면 구대륙 경제의 ‘아시아 분산화’, 노동력과 생산성 저하, 에너지 문제에 대한 조치와 대책 등 눈에 잘 보이지 않는 내부 원인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앞으로 지구촌은 어떤 세계를 대비해야 하나.
“새로운 세계를 준비하려면 2세기 반 전 서양의 산업혁명이라는 사회·경제적 모델을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 인류의 산업혁명 모델은 △화석에너지 추출 △인력과 기술을 이용한 가공 △소비라는 3단계 구조를 갖고 있었다. 화석에너지 고갈과 환경오염이라는 결과는 예상하지 못한 채 오로지 성장과 부의 창출에만 집중해 온 것이다. 최첨단 기술과 화석에너지, 석탄, 석유는 인류의 지속적인 발전을 가능하게 했다. 그 덕분에 한국 역시 30년이라는 짧은 기간에 믿을 수 없을 만큼 어마어마한 발전을 한 것 아닌가. 이제 이런 모델을 다시 생각해야 한다. 환경을 생각하며 금융 식량 에너지 안보 위기에 각국이 희생하겠다는 각오로 똘똘 뭉쳐 공동 대처해야 하는 세상이 온 것이다.”
―앞으로 유럽은 물론 세계를 위협할 만한 미래의 위기는 어떤 것이 있을까.
―지구촌의 미래를 짊어져야 할 청년들의 실업 문제가 너무 심각한데….
“경제 상황과 밀접한 관계가 있지만 철학적 제도적 접근도 중요하다. 국가별로 적합한 청년 교육 시스템을 도입해야 한다. 프랑스를 보자. 프랑스 교육의 목적은 시험을 잘 치고 그저 머리가 똑똑한 사람을 기르는 것뿐이다. 프랑스는 시앙스포, 에콜폴리테크니크, 에콜노르말 같은 명문대를 나와야만 성공했다고 평가한다. 이러면 안 된다. 기업 내 고질적인 상하 계급제도, 위기 극복에 필요한 인성의 부족이 불러오는 문제가 심각해지고 있다. 기업에서 높은 위치에 있다고 해서 위기의 순간에 올바른 결정을 내릴 자질이 있다고 볼 수는 없다. 사회 각 분야가 필요로 하는 인재를 길러 내고 조직이나 기업에서의 위치에 관계없이 그 인재의 능력과 인성을 인정해 주는 환경이 필요하다. 프랑스에는 수작업을 필요로 하는 직업이 많지만 인정받기 어렵고 무시당하기 쉬운 직업이라는 이유로 외면당하고 있다. 이는 프랑스 문화의 장애이기도 하다. 또 청년들이 교육과 기업 연수를 병행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론과 실무의 병행은 기회와 가능성의 창출과 생산성 제고 측면에서 매우 중요하다. 셋째, 역설적이겠지만 퇴직 연령을 높여야 한다. 고령자들이 청년의 일자리를 빼앗지 않으면서 오래 일을 해야만 젊은층의 세금 부담이 줄고 일자리 창출이 용이해진다. 실업률을 낮추려면 청년부터 고령자까지 최대한 많이 일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 노동시장의 유연성이 중요한 이유다. 프랑스 인구의 40%를 차지하는 25∼58세 계층이 일자리의 80%를 점유하고 있다. 이건 큰 문제다. 조금 과장하면 58세 이후엔 더 일하지 말고 정신적인 발전 없이 죽음을 기다리라는 얘기와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 프랑수아 라슐린 교수는 ::
1924년 설립돼 정부와 국회의 경제·노동정책 입법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경제·사회·환경 자문위원회(르세즈)’ 위원 겸 특별고문으로 현재 파리정치대학(시앙스포) 경제학 교수다. 세계중앙은행 창설을 주장하는 프랑스의 대표적인 경제학자 중 한 명. 제2차 세계대전 때 유명했던 레지스탕스 라자르 라슐린의 아들로 시앙스포, 영국 케임브리지대에서 공부했고 파리10대학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후 파리10대학 교수를 거쳐 1984년부터 시앙스포 교수로 재직 중이다. 2000∼2010년 르세즈 부위원장을 지냈다. 통찰력 있는 안목과 해박한 경제·사회 분야 지식을 담아 화제가 된 ‘세계경제’(1985) ‘시장경제’(1996) ‘돈은 어디에서 오나’(2006) 등 서방 경제학계가 주목한 10여 권의 저서가 있다. 저서 대부분이 영어 독일어 등으로 번역돼 미국과 유럽 각국에서 출간됐다.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았으며 르몽드 등 유력지에 활발하게 기고하고 있다.
파리=이종훈 특파원 taylor55@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