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필리핀서 교포에 죽을 뻔한 한인사업가 ‘필사의 탈출기’
필리핀에서 의류 사업을 하는 김 씨는 전날 밤 친척인 조 씨의 전화를 받았다. “중고차를 싸게 판다는데 차를 함께 받으러 가자”라는 것이었다. 조 씨에게 중고차 매매를 제안한 사람은 조 씨의 지인 유모 씨(48)였다. 조 씨가 마닐라에서 청소년 오락기 공급업체를 운영하며 소송에 휘말렸을 때 통역을 해준 인연으로 알게 됐다. 유 씨는 필리핀에서 10년 넘게 살아 현지어에도 능숙했다. 이튿날 조 씨를 따라 나선 그 길이 지옥행이라는 걸 김 씨는 알지 못했다.
이마에 닿은 총구는 뜨겁게 달궈져 있었다. 김 씨는 훗날 “그때 화약 냄새를 맡으며 이렇게 죽을 순 없다고 생각했다”라고 했다. 김 씨는 눈앞의 총을 밀치고 현관으로 뛰기 시작했다. 현관에 닿을 즈음 어깨에 묵직한 충격을 받고 넘어졌다. 누군가 둔기로 내리친 것이었다. 유 씨였다. 그는 ‘밖에서 차만 보고 가겠다’던 조 씨와 김 씨를 “집에 마누라와 애들이 있으니 차 한잔 하고 가라”라며 집안으로 끌어들였다.
“뒷마당에 파묻으면 아무도 몰라. 다 파놨으니 빨리 옮겨.” 희미하게 의식을 찾은 김 씨의 귀에 말소리가 들려왔다. 등에 총 두 발을 맞았지만 다행히 주요 장기는 피해갔다.
몸을 움직여 보자 뒤로 묶인 팔은 여전히 조금도 움직일 수 없었다. 하지만 발 쪽은 매듭이 무릎 쪽으로 살짝 올라와 조금씩 움직일 수 있었다. 그때 갑자기 방문이 열렸다. 옷 주머니를 뒤지는 거친 손길이 느껴졌다. 신분증이나 현금을 챙기려는 듯했다. 김 씨는 눈을 감은 채 숨을 멈추고 죽은 듯이 있었다.
유 씨 일당은 김 씨를 옮겨 뒷마당에 파놓은 구덩이로 내던졌다. 내팽개쳐지면서 자갈에 얼굴을 정면으로 찧었다. 순간 신음소리가 나올 뻔했지만 가까스로 삼켰다. 그들이 나머지 시신을 가지러 간 사이 김 씨는 있는 힘을 다해 로프에 묶인 두 발을 움직였다. 빠질 듯하면서 끝내 빠지지 않았다. 곧 유 씨 일당의 발걸음 소리가 났다. 다시 죽은 듯 누워 있는 김 씨의 등 위로 조 씨의 시신이 겹쳐졌다.
운전사의 시신이 도착할 때까지가 김 씨에게 주어진 마지막 시간이었다. 발목이 피투성이가 되고서야 비로소 발 한쪽이 로프에서 빠졌다. 오른발은 땅에 질질 끌렸지만 왼발은 땅에 닿을 새 없이 숨 가쁘게 내달렸다. 김 씨가 대문을 여는 순간 운전사 시신을 들고 현관문을 나서는 유 씨 일행과 눈이 마주쳤다.
김 씨가 현지 경찰에 신고하면서 유 씨 일당의 범행이 드러났다. 김 씨에게 총을 쏜 남자는 현지 여행가이드인 이모 씨(44)였다. 이 씨는 2010년 검거된 뒤 국내로 송환돼 무기징역을 선고받았고 공범 안모 씨는 2007년 국내에서 검거돼 징역 8년형을 선고받았다. 1990년대 중반 필리핀에 건너간 주범 유 씨는 지난해 7월 현지에서 한국 경찰관에게 붙잡혀 22일 국내로 송환됐다.
신광영 기자 ne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