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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한국 ‘탈북자 간첩’ 딜레마] 학력-경력 위조

입력 | 2013-01-23 03:00:00

“몸값 부풀려야 南서 대접받아”… 탈북前 미리 신분세탁도




북한 화교 출신 유모 씨(33)의 ‘탈북자 위장입국 및 간첩사건’은 한국 내 탈북자 사회에서도 논란이 되고 있는 경력 사기와 관계 당국의 부실한 관리 실태 등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사례다.

유 씨는 서울시에 제출한 인사 서류에 함경북도 경성의학전문학교를 졸업했다고 적었다. 언론 인터뷰에선 청진의대를 졸업하고 의사로 활동했다고 밝혔다. 유 씨는 경성의전에 입학은 했지만 졸업하진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결국 유 씨의 말은 둘 다 거짓이었지만 탈북자들이 유 씨처럼 경력을 속였다고 불이익을 받은 전례는 거의 없다. 그렇다 보니 이런 일부 탈북자의 거짓말에는 브레이크가 없다. 내막을 아는 탈북자들 사이에서 비난을 받을 뿐이다.

탈북자들의 경력 사기에는 몸값을 부풀리려는 일부 탈북자의 그릇된 사고와 자극적인 증언이나 고위급 탈북자에게만 신경을 쓰는 한국 사회의 풍토, 거짓인 줄 뻔히 알면서도 팔짱 끼고 지켜보기만 한 정보 당국의 무책임이라는 세 가지 요소가 복합적으로 작용하고 있다.

○ 거짓 권하는 사회

“유명 예술대를 나와서 김정일 앞에서 공연한 유능한 예술인.”

“북한 주요 기관에서 비밀을 많이 다뤘던 탈북자.”

한국의 언론에는 이와 비슷한 유형의 탈북자들이 심심치 않게 등장한다. 하지만 실제 그들의 말이 맞는지 확인할 길이 없다. 분명한 것은 북한에서 대단한 일을 했다고 주장할수록 다른 행사에 초청받을 기회와 개인 수익이 늘어난다는 점이다.

물론 언론을 상대로 터무니없는 거짓말을 하는 탈북자가 많지는 않다. 또 북한이 한국 언론을 모니터링하고 있는 상황에서 자신을 그대로 다 드러낼 수 없는 탈북자들로서는 일부 자신의 과거를 가공하는 게 불가피하다는 동정론도 없지 않다. 그러나 몸값을 높이려고 의도적으로 거짓말을 하는 일부 탈북자로 인해 북한의 실상이 한국 사회에 왜곡돼 전달되는 결과로 이어지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현상을 두고 탈북자만 탓할 수는 없다. 자극적인 소재만 찾는 한국 사회의 인식이 이들에게 ‘생계형’ 거짓을 권하는 경우도 없지 않기 때문이다. 때때로 교회에 간증하러 다닌다는 한 탈북자는 “북에서부터 모태신앙을 가졌다거나 중국에서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 기적을 경험했다는 등의 소재가 없으면 다시 불러주지 않는다”고 고백했다. 생활고에 허덕이는 탈북자들에게 수십만 원의 강연비는 매우 큰돈이다.

점점 자극적인 소재에만 관심이 쏠리게 되니 진실을 말하는 사람이 오히려 거짓말쟁이라는 굴레를 쓰고 피해자가 되기도 한다. 이는 탈북자 사회 전체의 신뢰성을 동반 하락시키는 부작용을 낳기도 한다.

탈북자의 경력 위조는 한국의 ‘학벌 중시 풍조’와도 연관이 있다. 적어도 북한의 그럴듯한 경력이나 학벌이 있어야 쉽게 취직할 수 있다는 것은 탈북자 사이에서 공공연한 사실이다. 그렇다 보니 검증되지 않는 경력을 자꾸 만들어내는 것이다.

탈북자들이 거짓 행세를 할 때 이를 적발하거나 정정할 수 있는 유일한 기관은 한국의 정보기관이다. 탈북자들이 한국에 입국해 조사받을 때 증언했던 경력 자료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탈북자들이 사회에 나가서 주장하는 경력이 다르다는 것은 쉽게 비교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정보기관은 신원 확인에 매우 인색하다. 경력을 과장해도 처벌받을 확률은 제로이고 오히려 이득을 취할 수 있는 확률은 큰 상황에서 탈북자들이 어떤 선택을 할지는 뻔한 일이다.

○ 몇 번 신문으로 결정되는 북한 경력

탈북자들이 한국에 입국한 뒤 일차적인 신문을 받는 합동조사기관 역시 인력과 전문성 부족 문제로 많은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최근엔 탈북자들이 한 달 평균 100명 남짓 입국하지만 과거에 많이 입국할 때는 200∼300명씩 오기도 했다. 많이 입국할 때는 조사 인력이 부족해 진짜 의심되는 사람을 제외하고는 신문 몇 번으로 대충 넘어가는 사례도 적지 않았다.

탈북자들이 한국에 입국한 뒤 가장 많이 숨기는 것이 학력이다. 대학을 다니지 않았더라도 대학 졸업자라고 하면 한국에서 대학을 졸업하기까지 필요한 4년을 절약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 탈북자는 “솔직히 말하면, 사정을 잘 알고 있는 집 근처 대학을 나왔다고 주장하면 넘어가는 사례들도 있다”고 말했다.

한국에 이미 정착한 가족이 있는 탈북자는 이런 사정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아예 탈북 단계에서부터 대학 졸업생으로 위장해서 입국하는 사례가 최근 늘어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증빙서류를 갖고 한국에 오는 탈북자가 드물기 때문에 진술에 의존해 경력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는 약점을 파고드는 것이다. 이 경우에는 조사관의 전문성이 높지 않으면 이를 쉽게 밝혀내기 힘들다. 정보기관의 한 전직 직원은 “탈북자 조사관은 승진이 잘 안 되는 한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아 우수한 수사 인력들이 기피하는 자리”라고 말했다.

정작 더 큰 문제는 관계 기관에서 처음 조사하는 과정에 밝힌 경력은 나중에 거짓임이 밝혀지더라도 수정하기 힘들다는 것이다. 한 탈북자는 “나중에 서류가 잘못됐다는 것을 알게 돼 정정하려고 했더니 ‘한번 작성된 서류는 고칠 수 없다’고 말해 지금도 못 고치고 있다”며 “잘못된 기록은 재조사 과정을 거쳐 고칠 수 있게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유 씨의 사례는 앞으로 비슷한 사건 재발을 막기 위해 필요한 조치들이 어떤 것인지를 역설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만약 전문성을 갖춘 수사관이 조사를 했다면 유 씨가 화교라는 사실을 초기에 밝혀냈을 가능성이 크다. 그가 조사 과정을 통과한 뒤라도 유 씨가 경력을 부풀리는 것을 보고 주의를 주거나, 유 씨가 화교라는 주위 탈북자의 신고를 접한 뒤 재수사를 거쳐서 유 씨의 탈북자 자격을 박탈했다면 그가 공무원으로 취직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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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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