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3일까지 중국 광저우 오페라하우스에서 열리는 ‘문화샤넬전’ 전경. 샤넬의 예술적 면모를 드러내는 사진과 글, 그림을 비롯해 패션작품과 향수 시계 등 400여 가지 아이템이 전시된다.
파블로 피카소가 1924년 발레 ‘푸른 기차’ 공연을 위해 제작한 무대 배경. 영국 런던에 있는 ‘빅토리아 앤드 앨버트 뮤지엄’의 허락을 받아 이번 ‘문화샤넬전’에 전시할 수 있었다.
프랑스의 유명 브랜드 샤넬은 16일 광둥(廣東)미술관과 공동으로 ‘문화샤넬전(Culture CHANEL)’의 막을 올렸다. 이 전시회는 3월 3일까지 광저우 시내의 오페라하우스에서 열린다.》
샤넬의 친구 피사코의 예술 살린 무대 배경 인상적
광저우 오페라하우스는 동대문디자인플라자의 설계자로 유명한 이라크 출신 여성 건축가 자하 하디드의 작품이다. 비정형 조약돌 모양의 건물에 걸린 큼지막한 포스터가 멀리서도 눈에 띄었다. 한 여인이 남성의 어깨 위에 목말을 탄 채 웃고 있는 사진이었다.
사진 속 여인은 가브리엘 샤넬(1883∼1971)이다. 럭셔리 브랜드의 대명사 샤넬의 창업자. 하지만 이번 전시회는 희귀한 체인벨트백이나 트위드 재킷을 진열하는 자리가 아니다. 그 대신 어린 시절 ‘코코’라 불렸던 한 여성이 샤넬이란 브랜드를 만들기까지 그에게 영감의 원천이 되었던 것들을 따라가는 여정이다.
투명한 유리로 공간을 구분한 문화샤넬전의 전시장 내부. 숨쉬고, 움직이고, 사랑하고, 꿈꾸고, 창조하라는 다섯 가지 키워드별로 나눠진 전시장을 따라가다 보면 샤넬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실마리를 얻을 수 있다.
고급 전시를 통한 ‘컬처 쇼크’
‘문화샤넬전’의 기획을 담당한 장루이 프로망 씨.
이번 전시에서는 처음으로 파블로 피카소의 작품이 등장했다. 샤넬은 피카소와 막역한 친구 사이였다. 전시의 큰 주제도 피카소가 1924년 ‘푸른 기차(The Blue Train)’ 발레 공연을 위해 직접 디자인한 무대 배경에 함축돼 있다. 프로망 씨는 해변에서 팔을 벌린 채 어디론가 향하는 두 여성의 모습에서 “이중적인 몸의 움직임을 읽어냈다”고 했다. 뭔가를 정복하기 위한 쟁취의 움직임과 자유를 찾아 어디론가 떠나는 움직임. 그림은 하녀가 도와주지 않으면 입을 수 없는 옷이 아닌, 팔을 자유롭게 들어올릴 수 있는 편한 옷을 만들고자 했던 샤넬의 삶과 묘하게 겹친다.
15일 저녁 오페라하우스에서 열린 최고급(VIP) 고객을 위한 파티에 참석하니 샤넬의 전략이 적중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곳에 참석한 중국인들은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각종 샤넬 제품을 둘러 ‘샤넬 숭배자’임을 과시했다. 그들에겐 다양한 상품을 갖춘 매장에서 구매력을 과시하는 것보다 샤넬의 패션 세계를 이해하는 문화적 취향이 더 중요해 보였다. 현재 샤넬은 광저우에서 매장 한 곳을 운영 중이다.
컬렉션을 앞두고 모델을 피팅 중인 샤넬의 모습(좌우)과 파블로 피카소가 모델을 그리고 있는 자신을 그린 그림(가운데).
“아주 오래된 이 새로운 것을 위해”
이번 전시는 샤넬을 이해하기 위한 다섯 가지 키워드로 △숨쉬고(BREATHE) △움직이고(MOVE) △사랑하고(LOVE) △꿈꾸고(DREAM) △창조하라(CREATE)를 제시했다. 5는 샤넬이 행운을 가져다준다고 생각한 숫자이기도 하다. 투명한 유리로 구분된 전시장을 배회하다 보면 샤넬에 대해 새로운 사실을 아는 재미가 쏠쏠했다. 이를 테면 이런 것이다.
지금은 여성스러움의 대명사로 통하지만 샤넬 의상은 남성의 옷에서 출발했다. 일과 스포츠를 즐기고 단발머리를 고수했던 샤넬은 남성 의류에 주목했다. 더 편안하고 활동적인 생활방식에 잘 어울리는 남성 의류는 그녀가 봤을 때 많은 장점이 있었다.
샤넬 광고의 콘셉트로 자주 사용된 두 명의 여성 모티프.
샤넬은 남성의 옷을 파고들었다. 한국에서는 ‘혼수백’으로 불리는 고가의 샤넬 체인벨트백이 사실은 말안장에 새겨진 퀼트 무늬에서 영감을 얻은 것이며, 오래 쓰기 위해 체인을 달았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트위드 재킷은 샤넬의 연인이었던 러시아 출신 드미트리 파블로비치 대공의 재킷을 조금 변형한 것이다.
전시장 가장 안쪽에는 나이 든 샤넬의 사진이 놓여 있었다. 몸을 오른쪽으로 기울인 그녀는 뭔가를 응시하며 오른손을 소파 위에 무심히 올려둔 모습이었다. 프랑스인 직원은 “전시회에 참석한 사람들을 지켜보고 있을지 모른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사진 아래에는 문인 한 사람이 그녀에게 보낸 편지 문구가 적혀 있었다. “아주 오래된 이 새로운 것을 위해.” 현재의 샤넬을 설명하는 가장 정확한 말인 듯했다.
광저우=글·염희진 기자 salthj@donga.com 사진· 샤넬 제공
▼ 샤넬이 사랑한 남자들, 불후의 명작들을 탄생시키다 ▼
1920년 촬영된 가브리엘 샤넬과 그의 연인 드미트리 파블로비치 대공의 사진. 샤넬은 대공의 영향을 받아 트위드 재킷과 향수를 만들게 된다.
샤넬은 여러 남자를 만나 사랑에 빠졌다. 고아로 자랐지만 상류층 남자들과 교류하며 고급문화를 경험했다. 그것을 토대로 다양한 패션 작품을 탄생시켰다. 좀 거칠게 말하면, 그녀는 그들을 나침반으로 이용했다. 하지만 그들을 순수하게 사랑했다. 첫사랑이나 다름없던 아서 카펠이 정략결혼을 하자 평생 독신을 고수했다. 남자를 만나는 순간만큼은 현재에 충실했다. 다음은 그녀가 만난 남자들과 거기서 영감을 받은 작품들이다.
에티엔 발장=고아였던 샤넬은 낮에는 바느질을 하고, 밤에는 카페에서 노래를 불렀다. 그곳에서 경주마를 소유한 부자, 에티엔 발장을 만났다. 파리 근교에 있는 발장의 저택에 머물며 샤넬은 승마를 배웠다. 경주마를 지켜보기만 하던 다른 여성과 달리 그녀는 승마를 직접 즐겼다. 하루는 발장의 승마복을 개조해 우아하면서 캐주얼한 여성용 승마복을 만들었다. 마구간에서 일하던 마부의 옷과 안장깔개에서 발견한 퀼트 무늬를 적용한 옷이었다. 체인벨트백의 퀼팅 무늬는 여기서 비롯된 것이다.
아서 카펠=영화 ‘코코샤넬’은 의상 디자이너로 성공하기 전 코코라고 불렸던 샤넬의 어린 시절을 그렸다. 고아 소녀가 영국 신사이자 사업가인 아서 카펠을 만나며 디자이너로서의 삶에 눈을 뜬다는 내용이다. 영화에서처럼 카펠은 샤넬이 모자를 직접 만들도록 격려했고, 실제로 1910년 파리의 캉봉 가에 모자 가게를 열도록 돈을 빌려줬다. 폴로 선수이던 카펠이 속옷으로 입던 저지 원단을 샤넬이 여성 의상에 접목한 것도 이때부터다.
드미트리 파블로비치 대공= 1920∼22년 샤넬은 공산정권의 처형을 피해 망명한 러시아의 드미트리 파블로비치 대공과 만났다. 이때 접했던 러시아 문화는 이후 샤넬의 작품에 큰 영향을 미쳤다. 러시아 전통 블라우스인 루바슈카(roubachka)나 퍼 라인 코트가 대표적인 예다. 특히 대공의 소개로 러시아 궁정 출신의 프랑스 조향사 에르네 보를 만난 건 하나의 사건이었다. 이후 샤넬은 보에게 “여성의 향을 담은 여성을 위한 향수”를 만들어 달라고 의뢰했고 1921년 ‘샤넬 넘버 5’가 탄생했다.
웨스트민스터 공작=1923년 샤넬은 웨스트민스터 공작과 사랑에 빠졌다. 그의 수수한 우아함과 차분한 매너에 반해서였다. 두 사람은 영국 시골을 산책했고 스코틀랜드에서 연어 낚시와 사냥을 즐겼다. 샤넬은 공작의 요트인 플라잉 클라우드와 커티사크를 타며 크루즈에 눈을 떴다. 그녀는 요트를 즐기면서 니트 저지로 된 카디건과 주름치마라 불리는 플리츠스커트를 만들었다. 선원들이 쓰던 화이트와 블루 색상의 베레모를 만든 것도 웨스트민스터 공작과의 여행에서 영향을 받았다.
광저우=염희진 기자 salthj@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