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세상이 허락하는 만큼만 선하지 ‘다크 나이트’(2008년)
인간은 무엇을 두려워할까. 죽음? 그렇지 않다. 사람을 간단하게 죽이기만 하는 공포영화를 본 적 있나. 사람들은 죽음보다 신체 훼손을 두려워한다. ‘쏘우’를 필두로 한 각종 고문영화를 보다 보면 사람들이 대체로 손발이 잘리는 것만큼이나 얼굴과 눈을 다치는 것, 피부가 뜯기는 걸 두려워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좀비나 뱀파이어를 다룬 고전 영화들, 또는 ‘바디 스내처’ 류의 작품을 통해서는 우리가 신체 훼손만큼이나 정체성 상실을 기피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에일리언’ 1편과 ‘프로메테우스’는 미지(未知)에 대한 두려움을 소재로 삼았다.
크리스토퍼 놀런과 히스 레저의 조커는 왜 그토록 무서운가. 그가 사람을 많이 죽여서? 사실 그가 영화 속에서 살해한 사람을 세어보면 몇 안 된다. 브루스 윌리스가 영화 한 편에서 평균적으로 죽이는 사람 수 정도다. 아니면 이 캐릭터 스스로의 설명대로 예측불가여서? 태풍과 산사태도 예측하기 어렵고 피해가 크지만 조커만큼 두렵진 않다. 그러면 알프레드의 말대로 그가 인간적인 동기를 짐작하기 어려운 괴물이라서? 글쎄올시다, 내가 보기에 그의 목적과 동기는 꽤 명확하고 인간적이다.
조커가 두려운 진짜 이유는 그가 사람을 타락시키려 들고, 그 목적을 거의 매번 아주 손쉽게, 희생자의 거의 자발적인 협조를 통해 이룬다는 점 때문이다. 그는 “가담자 수가 줄면 배당이 그만큼 커진다”며 은행 강도를 꾀거나 갱 조직원들에게 “한 명밖에 받을 수 없으니 적성검사(tryout)를 하자”며 서로 죽이게 시킨다. 어디인지도 모를 병원의 직원과 환자들을 살리고 싶으면 아무 죄도 없는 회계사를 암살하라고 시청자를 유혹하거나 멀쩡한 시민과 죄수들을 각각 다른 배에 태우고 상대편 배를 폭파하라고 강요한다.
조커는 경찰 취조실에서 배트맨에게 이를 한 줄로 요약한다. “사람들은 세상이 허락하는 만큼만 선하다(They’re only as good as the world allows them to be)”고. “이른바 문명인도 기실 판돈이 떨어지면 산 채로 서로 잡아먹을 놈들”에 불과하다고. 조커는 이 주장을 입증하기 위해 문자 그대로 목숨을 건다. 어떻게든 배트맨을 살인자로 만들기 위해 그가 탄 바이크 앞에 태연하게 서고, 배트맨이 자신을 죽일 듯이 때리거나 빌딩 아래로 내던질 때 오히려 기뻐한다. 영화 끝에서 그는 배트맨과의 싸움에서 졌다는 점을 아쉬워하지 않는다. “너 진짜 청렴하구나(You truly are incorruptible)”라며 탄식할 따름이다.
관객의 간담이 서늘해지는 이유는 ‘나는 배트맨과 달리 저 희생자들과 같은 처지에 서게 되면 별 수 없을 것’이라는 자각 때문이다. 게다가, 조커의 유혹은 섬뜩하도록 우리가 사는 이 자본주의 세상과 닮아 있다. 학교에서, 합숙 면접장에서, 직장에서 많이 봤고 여러 번 겪은 일들 아닌가. 내가 살고 싶으면 남을 죽여야 한다는 것. 경쟁 앞에서 야비해지지 않고 비열해지지 않는 사람이 몇이나 있던가.
역설적이게도 이 영화는 한 가닥 위안도 준다. 어딘지 미심쩍은 집단 지성과 일부 고결한 사람의 양심 얘기를 하려는 게 아니다. 이 영화를 보면 공포와 불안감 덕택에 우리가 타락을 그토록 두려워한다는 사실 역시 깨닫게 된다. 비록 유혹 앞에 약하긴 해도, 적어도 우리가 타락을 즐겁게 받아들이는 존재는 아닌 게다. 구원의 가능성도 거기 있을 터다.
tesomiom 2001년과 2003년, 2004년에 야비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