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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미석의 詩로 여는 주말]‘태백산행’

입력 | 2013-01-26 03:00:00


‘태백산행’
-정희성(1945∼)

눈이 내린다 기차 타고
태백에 가야겠다
배낭 둘러메고 나서는데
등 뒤에서 아내가 구시렁댄다
지가 열일곱살이야 열아홉살이야
구시렁구시렁 눈이 내리는
산등성 숨차게 올라가는데
칠십 고개 넘어선 노인네들이
여보 젊은이 함께 가지
앞지르는 나를 불러 세워
올해 몇이냐고
쉰일곱이라고
그중 한 사람이 말하기를
조오흘 때다
살아 천년 죽어 천년 한다는
태백산 주목이 평생을 그 모양으로
허옇게 눈을 뒤집어쓰고 서서
좋을 때다 좋을 때다
말을 받는다
당골집 귀때기 새파란 그 계집만
괜스레 나를 보고
늙었다 한다


88세 때 그린 피카소의 ‘누드와 앉아있는 남자’.

일본의 채색 목판화 ‘우키요에(浮世繪)’는 고흐를 비롯한 유럽 화가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에도시대의 가쓰시카 호쿠사이(1760∼1849)는 우키요에의 대표 작가다. 스스로를 그림에 미친 화가라 칭한 그는 “70세 이전의 그림은 가치가 없고, 80세에 발전을 이루며, 90세에 비로소 예술의 비밀을 터득하고, 100세에 예술이 숭고해지며, 110세에 이르면 선과 점에 삶이 스며들 것”이란 말을 남겼다. 여기에 따르면 파블로 피카소(1881∼1973)는 ‘예술의 비밀’을 꿰뚫고 20세기 미술에 금자탑을 세운 거장이다. 60대에 판화, 고희를 넘겨 도자기의 새 영역에 매진하는 등 그의 위대성은 평생 실험과 도전을 멈추지 않은 데서 확인할 수 있다. 지금 전북도립미술관에 전시 중인 ‘누드와 앉아있는 남자’는 미수(米壽) 때 그림으로 관객의 발길을 가장 오래 붙잡는다.

나이 들수록 원숙함을 평가받는 화가와 달리 영화배우, 특히 늙은 여배우는 퇴물 취급받기가 십상이다. 하지만 지난해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받은 ‘아무르’에선 80대 여배우가 빛을 발한다. 노부부의 삶과 죽음을 성찰한 이 작품은 작품상 등 올해 아카데미상 5개 부문 후보에 올랐다. 에마뉘엘 리바(86)는 ‘히로시마 내사랑’(1959년)의 매혹적 여주인공에서 세월의 주름살이 오롯이 새겨진 얼굴로 변했으나 혼신의 열연으로 오스카 사상 최고령 여우주연상 후보로 선정됐다.

나이를 잊은 도전이 특별한 천재들의 전유물은 아니다. 20일 101세로 타계한 일본의 시바타 도요 할머니는 92세에 시 쓰기를 시작하고 98세에 첫 시집 ‘약해지지 마’를 펴냈다. 이 책은 150만 부 넘게 팔렸고 평범한 할머니는 세계 최고령 시인의 영예를 얻었다. 정희성 시인이 들려주듯, 칠순 넘긴 사람에겐 ‘쉰일곱’이 참 젊다. 하물며 ‘살아 천년, 죽어 천년’의 수명을 자랑하는 나무가 보기엔 새해가 되면 반복되는 인간의 나이타령이 엄살처럼 들릴 것이다. 산신령 다 되어가는 태백산 주목의 눈에야 다들 참 좋은 때로 보일 것이다.

생물학적 나이야 누구든 피할 도리 없겠으나 이제부터라도 마음만은 조로하지 않도록 챙길 일이다. 올해 몇 살이 됐든, 지금 나이가 ‘가장 좋을 때’란 사실을 기억하면서.

고미석 mskoh119@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