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순덕 논설위원
부모를 모두 흉탄에 잃고 박근혜(GH) 대통령 당선인 자신도 커터칼 테러를 당한 트라우마가 있다는 것을 이해 못 하는 바 아니다. 북한의 ‘무리수’에 각별히 대비해야 할 상황에 경호의 중요성을 외면할 사람은 없다.
그러나 GH에게 트라우마가 있다면 국민에게도 트라우마가 있다. 현 경호처장 이름은 모르는 국민이 대부분이지만 경호실장 하면 ‘피스톨 박’ 박종규, ‘정권 2인자’ 차지철이 떠오를 수밖에 없다.
성공한 여성 리더가 아버지에게 큰 영향을 받는다는 건 다른 나라 경우도 마찬가지다. GH의 성격이나 태도, 애국심도 아버지를 닮았다고 한다. 특히 2인자를 두지 않는 인사 스타일은 아버지에게서 배웠다는 게 정설이다.
누구에게도 힘을 실어 주지 않는 분할통치는 충성 경쟁을 낳는 통치술로 꼽힌다. GH 비서실은 비서 역할만 하도록 축소한다지만, 같은 장관급 장을 둔 경호실의 사기가 하늘을 찌를 때 옆에서 구경만 할 수 있을지 의심스럽다. 정치학자 김일영은 “비서실과 경호실은 대통령 친위조직이고, 근대관료제의 탈을 쓴 가산적(家産的·patrimonial) 조직”이라고 했다. 오죽하면 “청와대 직할체제가 강화되면서 과거 권위주의 시대로 회귀하는 게 아닌지 의심의 눈초리를 거둘 수 없다”라는 민주당의 비난에 끄덕거리는 사람이 적지 않겠나.
안 그래도 박정희 시대 측근 2세들의 대통령직인수위 중용이 ‘세습 정치’를 떠올리게 한다는 비판이 나온 판국이다. 아무리 능력 위주의 인사였다 해도 정영사(正英舍)와 정수장학회 출신 인물 등용도 개운할 순 없다. 이명박(MB) 대통령이 고소영(고려대·소망교회·영남 출신) 인사를, 노무현 전 대통령이 코드 인사를 했을 때도 “능력이 있는데 왜 문제가 되느냐”라고 그들은 반박했었다.
출신 성분으로 GH를 사로잡을 수 없는 관가에서 박정희 유산 계승 경쟁이 벌어지는 것도 낯간지럽다. 농림수산식품부는 2011년부터 추진해 온 ‘우리 농어촌 운동’을 제2의 새마을운동으로 확대하고, 행정안전부는 복지형 새마을운동 추진을 검토한단다. 만일 새마을 장학생 1기 출신으로 휴대전화 통화연결음까지 새마을노래인 최외출 영남대 교수가 비서실장이 된다면 온 나라가 새마을운동 동원 체제로 돌아가는 분위기를 피할 수 없을 것 같다.
아주 단순한 사실도 설명이 부족하면 사람들은 불안해하고, 부족한 공백을 메우느라 억측과 뒷담화에 신경을 곤두세우게 돼 있다. 멀쩡한 정책이나 인사에 대한 음모론도 여기서 나온다. 결과만 좋으면 다 좋다며 넘어가기엔 국민의 의식과 기대 수준이 너무 높아져 버린 상태다. 인수위의 불통과 과거의 그림자가 ‘독재자의 딸’ 이미지로, 새 정부의 독선으로 굳어지면 GH정부의 성공에 걸림돌이 될 수 있다.
대통령마다 “인기에 신경 쓰지 않는다”라지만 지지율은 정책을 집행하고 비전을 실현하는 데 큰 힘이 된다. 새 대통령 취임을 앞둔 이맘때는 국민도 희망에 들떠서 대선 득표율보다 20%쯤 높은 70% 이상의 지지도를 보내는 게 보통이었다. 그런데 지금 GH의 지지율은 63.6%(리얼미터)∼55%(한국갤럽)다. 이 정도로는 국민의 마음을 얻을 수 없다. 말로는 ‘신뢰’를 내세우면서도 사람을 믿지 못하는 자신을, 아버지를 놓아 달라면서 정작 자신은 놓지 못하는 현실을 극복해야 한다.
GH가 역할 모델로 삼는다는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1세가 그랬다. 어린 시절이 괴로움뿐이어서 미래만 보며 일에 매달렸다. 세상을 의심했기에 통찰력 있는 참모들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필요하면 연기와 정치력 발휘를 서슴지 않은 덕에 영국을 ‘엘리자베스+전 국민의 에너지’로 꽉 채울 수 있었다고 전기 작가 슈테판 츠바이크는 소개했다.
GH는 “중소기업을 살리려면 거창한 정책보다 손톱 밑에 박힌 가시를 빼야 한다”라고 했다. 지난주엔 신발 안의 돌멩이까지 살피겠다며 감기에 걸려도 걱정 말라고까지 했다. 그런 그가 자신에게 투표하지 않은 48%는 물론이고 51%의 ‘가슴속 납덩이’는 왜 보지 못하는지 알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