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청춘예찬’ ★★★★☆
창단 10주년을 맞은 극단 골목길 연작 페스티벌 ‘난로가 있는 골목길’의 마지막 작품으로 5년 만에 무대에 오른 ‘청춘예찬’. 스물둘에도 여전히 문제아 고등학생인 청년(김동원·가운데)이 살림을 차리겠다며 데려온, 다섯 살 연상에다 소아마비 후유증에 간질병까지 있는 여인(이봉련)을 놓고 무능하고 이기적인 아버지(이규회)와 웃음과 눈물이 교차하는 기싸움을 벌인다. 극단 골목길 제공
연극을 보는 중간에 문득 기형도의 시 ‘오래된 서적’의 이 시구가 떠올랐다. 스물두 살 나이에 아직도 고등학생인 청년(김동원)의 영혼의 페이지는 온통 잿빛이다.
홀아비 신세인 아버지(이규회)와 맞담배질도 모자라 아비가 소주에 티백을 타 마시는 것을 보고 “영혼이 없는 소주나 마시고 있다”고 면박을 준다. 그런 녀석을 어떻게든 인간 만들어보려던 4년째 담임교사(김태균)조차 “너 좋아하는 술 매일 사 줄 테니 제발 학교 근처에도 나타나지 마라” 할 만큼 구제불능의 낙제생이다. 게다가 화가 나면 물불 안 가리고 주먹까지 휘두른다. 그런 녀석이 자신보다 다섯 살이나 많은 동급생의 배다른 누나(이봉련)와 엉겁결에 하룻밤을 보낸다. 그런데 그 누나는 소아마비로 한쪽 발을 저는 데다 간질병까지 있다.
녀석이 그처럼 구박하는 아비는 생활력 젬병의 사내이고 어미(정은경)는 부부싸움 도중 아비가 뿌린 염산에 시력을 잃고 이혼을 한 채 안마사가 돼 딴 남자와 살림을 차렸다. 아비는 툭하면 그 어미를 찾아가 손을 내밀고 어미는 자신에 대한 죄의식 때문에 계속 자신의 주변을 맴도는 아비를 쳐내지도 품어주지도 못한다.
기형도의 시 ‘위험한 가계·1969’를 압도하는 이런 가계도는 더욱 위태한 상황으로 치닫는다. 녀석과 하룻밤을 보낸 간질병 걸린 누나가 임신을 한 것 같다며 달라붙는다. 온갖 욕설과 협박으로 누나를 떼어 내려던 녀석은 “그래 갈 데까지 가보자”라며 아비와 단둘이 사는 단칸방에서 살림을 차리겠다고 선포한다. 그 난감한 상황에서도 아비는 태연자약하게 답한다. “작정을 했구나, 막 살기로.”
얼핏 치기어린 위악(僞惡)처럼 보이던 청년의 돌발적 선택은 술상 앞에서 벌어진 부자간 육탄전으로 점입가경에 들어간다.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는 그런 상황에서 누나의 간절한 읍소와 간질병 발작이 터진다. 그 순간 주체할 수 없는 슬픔이 몰려든다. 도대체 왜?
아비의 충고처럼 ‘인생은 금방이다’. 그걸 좀 유식한 말로 인생은 비가역적이라고 한다. ‘돌이킬 수 없다’는 뜻이다. 아비의 한순간의 실수로 돌이킬 수 없게 된 청년의 가정이 이를 온몸으로 증언한다. 그걸 누구보다 잘 알 청년은 왜 한 번밖에 없는 인생을 불나방처럼 불태우려는 걸까.
극작가이자 연출가인 박근형과 그가 이끄는 극단 골목길의 출발점이라 할 이 작품에서 사람들이 간과하는 부분이다. 이 연극의 제목은 단지 ‘청춘은 아름다워’라는 통념을 비튼 것만이 아니다. 눈물겹도록 아름다운 청춘이 진실로 무엇인지를 제대로 보여준다.
이런 아들의 돌직구 같은 진심이 아비의 잠들었던 부성애를 일깨운다. 단칸방에서 아들 내외와 한 이불 덮고 자던 아비는 아들의 친구 용필(이호열)에게 불쑥 “널 낳아주신 분이 누군지 아느냐”는 질문을 던진다. 그리고 “그야 당연히 엄마죠”라는 용필의 답에 “아니다, 아버지다”라고 답한다. 사자소학(四字小學) 첫 구절에 나오는 ‘부생아신(父生我身)’을 염두에 둔 말이다. ‘나를 생성한 존재가 아버지’라는 뜻이다.
그리고 다시 옛 아내를 찾아간 아비는 손주 낳으면 보라고 집 천장에 붙여놓은 별을 이야기한다. 거기서 우리는 전혀 예상치 못했던 칸트 철학과 조우한다. “내 마음을 늘 새롭게, 더 한층 감탄과 경외심으로 가득 채우는 두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내 머리 위에 있는 별이 빛나는 하늘이고, 다른 하나는 내 속에 있는 도덕법칙이다.”
인생의 비가역성에 굴복하지 않기 위해 자신을 통째로 불태울 수 있는 그 무엇 때문에 청춘은 아름다운 것이다.
초연 멤버인 윤제문 씨가 아버지 역으로 번갈아 출연한다. 2월 10일까지 서울 대학로 스튜디오 76. 1만5000∼3만 원. 02-6012-2845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