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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병선 기자의 영화와 영원히]참 묘하다 ‘텅 빈 매력’

입력 | 2013-01-29 03:00:00

30일 개봉 ‘베를린’을 통해 본 하정우




‘베를린’의 북한 공작원 하정우(오른쪽)는 남한 국정원요원 한석규와 수컷 냄새 나는 끈적한 캐릭터 대결을 벌인다. CJ E&M 제공

2년 넘게 영화 담당 기자를 하며 못 만난 배우가 있다. 하정우다. 그는 ‘절친’이 운영한다는 서울 강남의 막걸리 집에 가끔 기자들을 불러 술을 산다. 하지만 기자는 그와 술을 마실 기회가 닿지 않았다. 그는 2년 동안 영화 9편에 나왔는데 인터뷰는 후배 기자의 몫이었다. 그에 대한 기자의 평가는 그래서 오직 작품으로만이다.

가장 핫한 충무로 스타인 하정우는 올해 ‘겨우’ 서른다섯. 김윤석 송강호 이병헌 같은 톱스타들이 대개 40대인 데 비해 어린 나이다. 2002년 ‘마들렌’에 단역으로 출연한 이후 벌써 30편 넘게 찍었다. 조연도 아닌데 부지런한 ‘노동자형 배우’다.

30일 개봉하는 ‘베를린’은 하정우의 연기를 다시 한번 곱씹게 하는 영화. 그의 역할은 베를린에 파견된 북한 간첩 표종성. 표종성은 국가정보원 자료에도 없는 신비의 인물이다. 액션의 화려함이 장기인 류승완 감독의 영화에서 하정우는 캐릭터를 보는 맛을 제대로 살려낸다. 아내에게도 냉정하게 당성을 따지는 표종성은 비애를 간직한 인물. 화려한 ‘총검술’을 자랑하지만 거대한 체제 앞에 스러져야 하는 비극적인 캐릭터다.

그동안 하정우가 보여준 매력은 참 묘하다. 그는 송강호처럼 유머가 넘치는 것도, 김수현이나 이병헌처럼 세련된 야성을 가진 것도 아니다. 장동건처럼 조각같이 생기지도 않았고, 김윤석처럼 열정적이지도 않다. 최민수나 정우성처럼 연민을 부르는 반항아 이미지도 없다.

그의 연기가 눈에 확 띄는 것도 아니다. 그는 자신을 버리고 캐릭터 속으로 빠져든다는 이른바 ‘메소드’ 연기의 김명민과 다르다. 그가 연기한 ‘러브픽션’의 구주월처럼 뜨거운 로맨스를 하거나 감정을 끝까지 몰고 가지 않는다. 자연인 하정우를 버리고 인물 속으로 파고드는 법이 없다. 하지만 ‘나’를 버리지 않고도 배역을 버리지 않는다.

관객과 감독, 제작자가 그를 좋아하는 이유는 아마도 그가 ‘군림’하지 않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에겐 배역에 대해 생각할 여지를 비워두는 영리함이 있다. ‘범죄와의 전쟁: 나쁜 놈들 전성시대’의 조폭 두목이나 ‘추격자’의 연쇄 살인범은 기존의 극악한 인물과 달리 어딘가 비어 보인다. 꽉 채워 오버하지 않고 관객이 다가오도록 덫을 놓고 기다릴 줄 안다.

군림하지 않는 연기는 마이너리티를 연기할 때 더욱 빛난다. ‘국가대표’의 입양아 출신 스키점프 선수, ‘황해’의 지질한 조선족이 그렇다. 그는 슈퍼 히어로인 적이 없다.

류승완 감독은 “하정우는 복 받은 배우”라고 했다. 조금만 표정을 지어도 감정이 잘 드러나는 얼굴을 가졌다고 했다.

연기자 집안(아버지 김용건, 동생 차현우) 출신인 그가 받은 축복이다. 그는 마치 태초의 직업적 숙명을 짊어진 것처럼 쉼 없이 달려가고 있다. 영화는 그에게 스타가 아닌 배우가 되는 과정으로 보인다.

민병선 기자 bluedo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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