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Q: 최근 출간된 연구서 ‘과거, 출세의 사다리’는 조선시대에 신분이 낮은 사람들도 과거시험에 대거 합격해 조선이 ‘개천에서 용 나는 사회’였음을 통계로 보여주었다(본보 23일자 A21면 참조). 다른 전근대 국가들과 비교하면 조선사회의 신분적 개방성은 어느 정도 수준이었나? 또 당시 신분이 낮은 사람들은 신분이 높은 사람들에 비해 경제적으로 공부에 몰두하기 어려운 여건이었을 텐데 어떻게 과거에 합격했을까? 》
한영우 이화여대 이화학술원 석좌교수 서울대 명예교수
유교 국가에서 과거제도를 실시한 데는 폭력적인 무인정치를 공익과 도덕을 지향하는 문인정치로 바꾸려는 목적이 담겼다. 그래서 시험에서 평가하는 내용도 정치의 공익과 도덕을 강조하는 유교 경전의 정신이 중심을 이뤘다. 물론 직업적 전문성을 요구하는 기술직 관원, 예를 들면 의관 역관 천문관 화원 등의 시험은 전문 지식이나 기술을 테스트했다.
미국에서 활발하게 연구된 중국의 과거제도는 평민의 신분 상승을 활발히 촉진시킨 것으로 밝혀졌다. 일찍이 사회학자 막스 베버도 과거제도에 주목하여 평민이 문인(literati)으로 상승하고 문인이 관원으로 상승하는 사회임을 인정했는데, 이를 뒷받침하는 통계적 연구가 나왔던 것이다.
응시자는 대부분 향교를 비롯한 학교에서 일정한 교육을 받은 학생이었지만, 학생들은 농번기에 방학하여 농사를 짓고, 농한기에 교육을 받아 농사와 글공부를 병행할 수 있었다. 관립학교는 학비가 없었고, 서원도 학비를 받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계(契)를 통한 상부상조의 재원은 흔히 있었다.
학업의 성취가 경제력과 비례하는지도 다시 생각해 봐야 한다. 시험이 아닌 다른 방법으로 인재를 선발할수록 오히려 가난하거나 학력이 없는 사람은 희망을 잃게 될 것이다. 조선시대의 과거제도는 학교를 다니지 않고 독학한 사람도 응시하는 데 아무런 지장이 없었고, 학력이나 나이에도 전혀 제한을 두지 않았다.
양반만이 부유하여 응시가 가능하고, 평민은 모두 가난하여 응시가 불가능했을 것이라는 생각도 증거가 없는 억측이다. 양반이라고 다 부유한 것도 아니고, 평민이라고 모두 가난하지도 않았다. 실제로 급제자들 가운데에는 가난하고 신분이 천하다고 알려진 인물이 무수히 많았고, 장원급제자 중에도 신분이 낮은 자가 적지 않았다.
과거제도를 시행한 한국과 중국은 세계적으로도 드물게 신분이동이 매우 역동적인 사회였고, 그 전통이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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