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계 재조명 움직임 활발
표암 강세황의 1748년 작 ‘지상편도(池上扁圖)’의 일부. 당나라 시인 백거이가 ‘지상편’에서 노래한 이상적 저택을 형상화해 자연에 은거하고픈 소망을 담은 이 그림은 담백한 화풍에 힘찬 필체가 어우러져 학문에 정진하는 문인의 정신세계를 잘 보여준다.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올해 문화계에선 강세황 탄신 300주년을 맞아 재조명 작업이 활발하다. 국립중앙박물관(관장 김영나)은 6월경 ‘예술로 꽃피운 조선 지식인의 삶’이란 부제 아래 작품 100여 점을 선보이는 특별전을 준비하고 있다. 표암의 묘(충북 문화재자료 83호)가 있는 충북 진천군도 상반기 그의 문화적 업적을 조명하는 학술대회를 열 계획이다. 대중에게 표암은 시와 글씨, 그림에 모두 능해 ‘삼절(三絶)’로 불렸다거나 단원 김홍도의 정신적 스승이었다는 정도로만 알려졌다. 하지만 표암은 당대 문단과 화단에서 ‘예원(藝苑·예술계)의 총수’라 불렸을 정도로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수많은 지식인과 폭넓은 네트워크를 형성했던 열린 사고의 소유자”(민길홍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사)였던 표암의 삶을 들여다봤다. 》
○ 자유로운 영혼을 지닌 조선의 ‘르네상스인’
표암이 칠순에 그린 자화상.
사대부 관습에 연연하지 않고 아내와 가족에 대한 사랑 역시 솔직하고 지극했다. 부인 유씨와 유난히 각별해 아내가 세상을 떠난 뒤에도 “쓸쓸한 산사에 벌써 두 달이 갔는데 어찌하여 한 자 소식도 없는가”라며 애달파 했다. 아들이 출사해 임지로 떠나게 되자 “이별을 말하려 하니 눈물 먼저 떨어지고…몇 년 떨어져 있어도 두 곳이 다들 평안하기만 바란다”는 시를 지었다. 평소 문인이나 화가와 만날 때도 언제나 아들들을 대동해 함께 교류하기를 즐겼다.
뭣보다 칠순에 그린 자화상(보물 제590호)은 그의 자유로운 정신세계를 여실히 보여준다. 61세에 임금의 뜻을 받들어 관직에 진출한 표암은 스스로를 야인으로 여기며 언제나 초야로 돌아가길 꿈꿨다. 예법에도 맞지 않는 흰 도포에 관모 차림은 바로 이런 표암의 심경을 대변한다. 당시 일반적이던 평면초상화와 달리 얼굴과 옷자락에 입체감을 살린 화풍도 서양화법을 과감하게 받아들인 그의 열린 자세에서 비롯됐다.
송도기행첩에 실린 영통동구도.
18세기 예술계의 ‘크로스로드’(교차로)라 할 만한 표암의 인적 스펙트럼은 예원의 총수란 별칭이 아깝지 않다. 하지만 그로 말미암아 그의 예술적 향취가 다소 가려진 부분도 적지 않다.
“지팡이에 앉은 한 마리 새가 날지도 못하고 울지도 못하네. 흰 눈 닮은 옷을 입었으니 해동의 국상을 아는 건가.”
그림 쪽에선 한 화풍에 집착하지 않았다. 진경산수화를 비롯해 풍속 인물 사군자 등 다방면에서 기량을 뽐냈다. 특히 45세 때 개성을 유랑하고 그린 ‘송도기행첩’은 독특한 음영과 채색 기법을 뽐내 화제를 모았다.
소담하되 진취적인 글씨는 당대 중국에서도 탐을 냈다. 72세에 청나라를 방문했을 때 많은 중국 지식인들이 앞다투어 표암에게 글자를 청했다고 전해진다. 건륭제조차 글씨를 본 뒤 ‘천골개장(天骨開場·뛰어난 재주가 글씨에 드러나다)’이라며 탄복했다.
본인은 탐탁지 않아 했으나 관재 또한 탁월했다. 왕릉 관리인쯤 되는 말단직 능참봉으로 벼슬길에 나서 10년도 안 돼 한성 판윤(서울시장)에 올랐다. 영조의 총애가 지극하기도 했으나, 인망이 두터웠던 표암의 처신이 올곧았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