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효임(1943∼)
눈도 못 맞추게 하시던 무서운 시어머니가
명주 베 보름새를 뚝딱 해치우시던 솜씨 좋은 시어머니가
팔십 넘어 치매가 왔습니다.
대소변을 가리지 못해
손발은 말할 것도 없고
방 벽에까지 그림을 그렸습니다.
대소변도 못 가리시면서 기저귀를 마다하시던 시어머니,
꼼짝 없이 붙잡힌 나는
옛날에 한 시집살이가 모두 생각났는데,
시어머니가 나를 보고.
엄니, 엄니 제가 미안 허요, 용서해 주시요 잉.
공대를 하는 걸 보고 마음을 바꾸었습니다.
우리 시어머니 시집살이도
나만큼이나 매웠나 봅니다.
이제는 전설 속에나 있을 캐릭터, ‘눈도 못 맞추게 하시던 무서운 시어머니’가 등장한다. 시인의 연배가 짐작되는 대목이다. 위 시가 실린 시집 ‘치자꽃 향기’에서 시인 소개를 보니, 시인은 열여덟 살에 결혼했다. 사십여 년, 그 긴 세월을 매운 시집살이 시키던 시어머니, 치매가 와서도 유난해서 시인은 ‘꼼짝 없이 붙잡힌’다. 시인도 젊지 않은 나이, 새삼 옛날 생각에 미운 생각이 버럭 나기도 하고, 어쩌면 고소하기도 하고, 만감이 교차하는데, ‘엄니, 엄니 제가 미안 혀요, 용서해 주시요 잉.’ 이 한마디에 마음이 풀린다. 치매 걸린 시어머니 눈에 나이 든 여인이 며느리가 아니라 시어머니로 보인다. 치매로 상한 머리에도 그 오래전 무서움이 지워지지 않는 시어머니! 우리 어머니들, 그렇게 제 며느리한테 호랑이 노릇 톡톡히 하고는 늙은 몸을 푹 맡겼단다. 고부(姑婦)간에 대를 물려 그랬단다.
진효임은 일흔 다 돼서 한글 공부를 시작했다. “한글을 배우니까 즐거운 일이 참 많습니다. 그중에서 제일 좋은 건 머릿속 생각들을 내 손으로 직접 쓸 수 있다는 것입니다.” ‘치자꽃 향기’ 앞머리에 적힌 ‘시인의 말’이다. 평생 소리(말)로 날려 보냈던 생각들을 이제 그림(글)으로 남기는 도취감! 소리를 붙잡아 앉히는 두근두근함을 그의 시 곁에서 숙연히 맛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