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간 김용준’이 걸어온 길
소아마비를 딛고 헌법재판소장에까지 오른 그의 인생은 한 편의 ‘인간 승리 드라마’였다.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이 24일 총리 후보자로 지명했을 때만 해도 75세 나이에 제2의 인생을 다시 시작하게 됐다는 얘기가 나온 바 있다. 하지만 총리의 꿈은 좌절됐다.
○ 장애 극복한 법조계 원로
하지만 ‘신동’이라는 소리가 따라다녔다. 장애인이라는 이유로 희망하던 경기고 진학이 좌절되기도 했으나 학업의 끈을 놓지 않았다. 서울고 2학년 재학 중 검정고시로 서울대 법대에 입학했고 대학 3학년인 19세 때 고등고시(현 사법시험)에 수석 합격했다. 22세이던 1960년 대구지법에서 최연소 판사로 법복을 입었다.
이후 40년 동안 법관 생활과 변호사 생활 12년을 포함해 50여 년 동안 법조인으로 지냈다. 김 후보자는 서울가정법원장을 거쳐 장애인으로서는 최초로 1988년 대법관에 임명됐고 1994년 제2대 헌재 소장이 됐다. 헌재 소장 시절 △과외교습 금지 △제대 군인 가산점 부여 △동성동본 금혼제 등 중요한 위헌 결정들을 이끌어 냈다.
청소년이나 장애인을 위한 활동도 활발히 했다. 서울가정법원장 시절 비행청소년과 사회지도자를 연결하는 소년 자원보호자 제도를 만들었다. 헌재소장 퇴임 후엔 경기 양주시 ‘나사로 청소년의 집’에서 비행청소년 선도 활동을 했다.
2007년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선 “장애와 가난 등을 이겨낼 수 있었던 유일한 방법이 공부였고 나는 특히 사회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았다”면서 “법관으로서 할 수 있는 것은 다 해보고 영예도 누린 내가 남은 생애에 해야 할 일이 있다면 그동안 받은 것을 갚는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주영 정책기획단장은 김 후보자가 포함된 영입 리스트를 박 당선인에게 보고했다. 당선인은 리스트를 검토한 뒤 김 후보자를 선대위원장 후보로 지명하고 접촉을 지시했다. 그를 공동 중앙선대위원장에 임명할 때 “제가 존경하는 분”이라며 “새누리당이 지향하는 소중한 가치인 법과 원칙을 잘 구현하고 향후 헌법적 가치를 구현하겠다는 의지를 말씀해주실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김 후보자는 선대위원장이었지만 전면에 나서거나 직접 유세를 다니는 스타일은 아니었다. 선대위 회의를 주재하면서도 거의 말이 없었다고 한다. 당시 한 선대위 관계자는 “김 후보자에게 주기적으로 여론조사 결과를 보고해도 ‘나는 정치를 잘 모르니 여러분이 잘 좀 해 달라’며 별말씀이 없었다”고 말했다.
박 당선인은 정치인생 15년 동안 각종 인연을 맺었지만 짧은 4개월을 함께한 그를 인수위원장에 이어 총리 후보자로 지명했다. 박 당선인 측 관계자는 “법질서와 사회 안전을 중시하는 당선인의 국정철학과 맞고 ‘큰어른’의 모습으로 인수위를 잘 이끄는 모습에 총리로 적격이라고 생각한 것 같다”고 말했다. 하지만 29일 총리 후보자에서 사퇴하면서 인수위 내 ‘큰어른’으로서의 역할도 기로에 서게 됐다. 조윤선 당선인 대변인은 “박 당선인이 곧 김 후보자의 인수위원장직 사퇴 여부를 결정할 것”이라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