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입금지 잔디밭에 난 무단횡단 길지도자가 ‘관행대로’ 그길 따라간다면 국민들이 신뢰하고 존경할 수 있을까
손태규 단국대 교수·언론학
공교롭게도 특별사면을 강행한 이명박 대통령이나 청문회에서 갖가지 의혹에 시달린 이동흡 헌법재판소장 후보자의 항변이 거의 똑같아 보인다. 언론 보도에 따르면 이 대통령은 지인들에게 김대중 전 대통령이 자신을 사면해 준 사실을 상기시켰다고 한다. 김 전 대통령을 전례로 삼겠다는 의지를 보인 것이다. 청와대 고위 관계자는 “(사면을) 필요할 때는 임기 중에 하도록 법에 명시돼 있고 이전 정부 때도 그렇게 해왔다”고 강조했다고 한다. 이른바 ‘관행’이라는 의미이다.
이 후보자도 출장비용으로 부인의 여행경비를 충당했느냐는 지적에 “100% 다 그렇게 하고 있다”고 답변했다. 해외 출장 때 부인 동반에 대해서도 “관례였다”고 말했다. 특정업무경비를 개인 용도로 사용했다는 의혹도 비슷한 태도로 변명했다. 하지만 이 대통령과 이 후보자 모두 관행에 대해 잘못된 생각과 태도를 갖고 있다. 두 사람 모두 국민의 비판을 무마하기 위해 관행을 명분으로 내세웠다. 관행이면 면죄부를 받을 수 있는 것처럼.
관행이 잘못된 것이면 하지 않으면 된다. 나쁜 관행은 좋은 관행으로 바꾸면 된다. 대통령이나 헌법재판소장 후보자라면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한다.
미국에는 1947년부터 해마다 추수감사절을 앞두고 ‘전국칠면조협회’와 ‘전국 가금류와 달걀 위원회’가 대통령에게 살아있는 칠면조 한 마리를 기증하는 행사를 백악관에서 여는 관행이 있다. 전국에 공개되는 그 칠면조는 추수감사절에 대통령이 먹는 것이다. 그러나 1963년 존 F 케네디 대통령은 ‘각하, 맛있게 드십시오’라는 글이 적힌 팻말을 목에 두른 칠면조를 보면서 “그냥 살려줍시다”라는 한마디로 오랜 관행을 깨버렸다. 언론은 다음 날 “케네디 대통령이 칠면조를 사면했다”고 보도했다. 또 “수십 년 동안 미국의 양심 속에 살아있을 개념 있는 행동”이라고 칭송했다.
하지만 대통령이 선물 받은 칠면조를 먹는 관행 대신에 사면하는 관행이 정착되기까지에는 20년이 더 걸렸다. 리처드 닉슨 대통령은 6년 임기 동안 갱 두목 등 926명의 범죄자를 사면했으나 칠면조는 한 번도 사면하지 않았다. 언론은 “그가 선물 받은 칠면조는 악당이란 말인가”라고 비꼬기도 했다. 제럴드 포드 대통령 역시 민주당 당사를 도청한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사임한 닉슨 대통령은 사면했으나 선물인 칠면조는 사면하지 않았다. 물론 이들이 ‘사면’이란 용어를 사용하지 않았을 뿐 칠면조를 먹은 것은 아니었다.
드디어 1989년 조지 부시 대통령이 공식으로 칠면조를 사면하는 관행을 세웠다. 백악관 인근에서 동물의 권리를 주장하는 단체들이 시위를 벌이는 가운데 부시 대통령은 “이 칠면조는 지금부터 대통령의 사면을 받았다”고 선언했다. 이어 빌 클린턴,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관행을 이어갔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도 지난해 추수감사절 때 선물 받은 칠면조를 사면한 뒤 관례대로 워싱턴 인근의 조지 워싱턴 전 대통령 생가 농장으로 보냈다.
중세 이탈리아의 정치사상가인 니콜로 마키아벨리는 “천국에 가는 가장 유효한 방법은 지옥에 가는 길을 잘 아는 것”이라고 말했다. ‘로마인 이야기’를 쓴 일본의 시오노 나나미는 이 말을 지도자가 되려는 사람은 자신이 지옥에 떨어지기를 각오해야만 국민을 천국으로 이끌 수 있다고 해석했다. 비록 인격에 문제가 있더라도 국민을 잘살게 해주는 큰 목적만 이루면 좋은 지도자라는 것이다. 결과만 좋으면 수단이 정당화되는 것이 정치라는 마키아벨리 식 사고는 뜨거운 역사적 논쟁거리이다.
이 대통령은 특별사면을 강행한 뒤 “법과 원칙에 맞는 사면을 했다”고 말했다. 이 대통령의 그 결단(?)을, 국민을 천국으로 이끌기 위해 지옥행을 감수했다고 여기는 국민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대부분의 국민이 이 대통령이 오로지 자신의 정치 목적을 위해 나쁜 관행을 고집했다고 생각할 뿐이다. 그야말로 국민을 위하는, 누가 봐도 명분 있는 일을 위해서라면 대통령이 꽃밭이 아니라 경부고속도로를 무단 횡단할지라도 나무라는 국민은 많지 않을 것이다. 칠면조 사면에 비해 한참 부끄러운 친구·인척 사면 때문에 한국 정치는 한참 뒷걸음질 치고 있다.
손태규 단국대 교수·언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