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장희의 스케치 여행… 조계사 백송
천연기념물은 순서와 중요도가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지만 1호부터 10호 중에 6점이 백송이란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하지만 인간의 관심과 보호가 나무의 삶을 완전히 보장해주는 것은 아니다. 천연기념물 백송은 태풍에 쓰러지기도 하고 뿌리 주변의 복토작업 후 갑자기 고사하기도 했다. 그리하여 여섯 그루 중 네 그루는 보존 가치를 상실해 천연기념물에서 해제되고 말았다. 현재는 두 그루만 남아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부담없이 만날 수 있는 백송
수송동 백송은 조계사 마당에 서 있다. 이 백송은 조계종 본찰(本刹)답게 거대한 처마를 가진 대웅전과 어우러져 더없이 운치 있는 모습이다. 하지만 건물과 가까이 있는 만큼 성장에 다소 지장이 있다. 게다가 나무를 보호하는 경계가 없어 바로 옆까지 밀고 들어오는 자동차도 위협적이다.
이미 말라죽은 가지들과 이런저런 수술 자국들로 나무의 모양은 기형이 됐다. 일부분은 받침대에 의존해 서 있다. ‘과연 500년을 살아온 수송동 백송의 남은 날은 얼마나 될까’ 하는 생각이 떠오른다. 분명한 건 그 남은 날의 길고 짧음에 우리가 큰 영향을 미칠 거라는 사실이다.
어찌 되었건 수백 년 동안 꿋꿋하게 한자리를 지켜온 커다란 나무가 도심 한복판에 있다는 건 무척 다행한 일이다. 나는 그동안 오랜 역사를 가진 다른 나라의 도시를 방문하며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런 인상은 대부분 문명의 흔적만큼이나 오래된 거리의 커다란 나무들에서 왔다. 그래서 오가며 부담 없이 만날 수 있는 서울의 백송들이 사랑스럽기만 하다(헌법재판소는 출입 허가를 받아야 하기에 부담이 아주 없지는 않다).
종소리 여운에 눈을 감다
오늘도 지나는 길에 조계사에 들러 백송을 만났다. 추운 만큼 맑은 겨울 하늘은 백송의 하얀색 수피와 초록색 잎을 더욱 돋보이게 만들고 있었다. 대웅전 안에서는 여전히 많은 사람의 소망이 담긴 배례가 이어지고 있었다. 낮은 풍경(風磬) 소리는 조용히 경내를 물들였다. 잠시 후 저녁 범종이 울리기 시작했다. 나는 종소리 사이의 긴 여운에 사로잡혀 절 마당 한편에 앉아 가만히 눈을 감았다. 깊은 산속 암자에 앉아 있는 듯 마음이 편안해졌다. 아마도 백송은 오랫동안 이런 미세한 공기의 떨림을 느끼며 한 잎 한 잎 침엽(針葉)을 피워냈으리라.
일러스트레이터 이장희 www.tthat.com
▼● 작가의 말 인생의 스케치 여행은 영원할 겁니다▼
2년 가까이 스케치여행을 연재하며 많은 곳을 여행했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여기까지 왔습니다. 그동안 많은 장소에서 많은 풍경과 많은 사람을 만날 수 있었던 건 모두 독자 여러분 덕이었습니다. 그 모든 것이 제게는 큰 기쁨이며 영광이었습니다.
누군가 “여행을 가장 명확하게 기록하는 방법은 그림을 그리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아무래도 스케치와 여행은 매우 ‘궁합’이 잘 맞습니다. 두 가지 모두에 엄청난 매력이 숨어 있는 것도 분명합니다. 이번 연재는 끝나지만 손이 움직여주고 발이 따라주는 한 제 인생의 스케치여행은 끝나지 않을 듯합니다.
늘 신나는 여행, 그리고 기분 좋은 만남을 이어가시기를 기원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