삭막한 피란지서 싹 틔운 문학예술의 배움터
6·25전쟁 기간에 우리나라 최초의 예술전문기관으로 세워진 ‘상고예술학원’이 있던 자리를 권영민 교수(왼쪽)와 이주형 경북대 명예교수가 둘러보고 있다. 사진 왼쪽 담이 있는 자리 일대(대구 남산동 657 일대)에 상고예술학원이 있었지만 지금은 주택가로 변해 흔적을 찾을 수 없다. 대구=황인찬 기자 hic@donga.com
1930년대 대구 남산동 교남학교에서 교사를 했던 시인 이상화(가운데 앉아 있는 사람)와 학생들 모습. 뒤편에 보이는 교남학교 건물은 1950년대 초 상고예술학원 교사로 사용됐다. 이상화기념사업회 제공
대구 출신의 문우(文友)였던 이상화(1901∼1943·‘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의 시인)와 이장희(1900∼1929·‘봄은 고양이로다’의 시인)의 호에서 한 자씩을 딴 ‘상고예술학원’이란 무엇인가. 지금은 그 흔적조차 찾기 어려운 이 학원을 기억하는 문인은 별로 없다. 6·25전쟁 당시 ‘피란도시’ 대구에 설립되었던 이 학원은 당대 최고의 교수진을 갖춘 국내 최초의 본격적인 예술학원이었다.
대구에 피란 온 예술가들이 중심이 되어 대구·영남 문인 예술가들과 힘을 합쳐 결성한 이 학원에는 무려 90명의 예술가가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소설가 박종화 김기진 김말봉 김동리 장덕조 최정희 정비석 최상덕 최인욱 박영준 김영수가 있고, 시인 이은상 오상순 유치환 구상 조지훈 박목월 박두진 양명문 김달진 박귀송이 뜻을 더했다. 국문학자 양주동 이숭녕, 평론가 최재서, 아동문학가 마해송, 극작가 유치진, 연극인 이해랑, 수필가 전숙희, 음악가 김동진 김성태 등 문학을 넘어 여러 예술 분야의 인사가 참여했다. 대구의 문화예술인 가운데는 시인 백기만 이효상 이호우 이설주 이윤수와 소설가 김동사, 국문학자 김사엽 왕학수, 화가 서동진 박명조 등이 대구의 유지들과 뜻을 합하여 참여했다.
1951년 10월 대구 남산동 향교 북쪽 편 길 건너 모퉁이의 단골 술집에 모인 문인들은 학원장에 마해송을 선임했다. 소설가 최인욱은 교무 담당, 시인 조지훈 구상, 소설가 박영준 최정희 등은 전임 강사가 됐다. 그리고 남산동 657 오르막길 옆에 있던 교남(嶠南)학교를 학원 교사로 정했다.
교남학교는 일찍부터 영남지역 근대교육의 출발점이었으며 이상화 시인이 1930년대 교편을 잡았던 곳이었다. 교남학교가 1942년 수성동으로 이전한 뒤 그 자리에 자리 잡은 상고예술학원은 교육기간 6개월 단위로 하는 단기 강습학원이었다. 하지만 당대 최고의 예술인들로 구성된 강사진과 수준 높은 강의 내용으로 전란 중에도 문학예술을 꿈꿀 수 있는 새 희망의 배움터가 되었다. 문학 음악 미술의 세 개 학과가 운영됐다. 수강 학생과 교수 모두가 강의가 끝나면 단골 막걸리집에 모여 피란생활의 고달픔을 서로 달래곤 했다.
상고예술학원은 전쟁의 혼란 속에서도 우리나라 최초의 문학예술 전문교육기관으로 자리 잡았다. 예술의 꽃을 피우고자 하는 뜨거운 열망도 가득했다. 당시 전쟁은 국군의 서울 수복 후 중공군의 남하로 더욱 치열해진 상황이었다. 서남지역에서는 공비토벌작전이 전개되면서 민심이 극도로 흉흉하였고, 국민 모두가 생계를 꾸리기 어려울 정도로 궁핍한 지경에 빠져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구지역의 유지들은 피란 문인들의 뜻을 받들어 학원 설립 자금을 지원했다. 학원의 운영은 처음부터 적자를 면하기 어려웠지만 여기 참여한 강사들은 열의를 갖고 가르쳤다. 하지만 학원은 개교 후 2년 반을 채 넘기지 못하고 사실상 폐교하고 말았다. 가장 큰 이유는 물론 경영상의 적자였다. 1953년 휴전회담이 진전되면서 다시 서울로 돌아가는 문인과 학생이 속출하면서 설립 당시의 열정이 식어버린 것도 한 이유였다.
지난달 24일 학원이 있었던 대구 남산동 657 일대를 찾았다. 그 옛날 강사와 학생이 어울리던 뒷골목 싸구려 막걸리집도 다 사라졌고, 주택가가 생겼다. 한편에는 주상복합아파트가 하늘을 찌를 듯 서있다.
정리=황인찬 기자 hic@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