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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청탁 5일만에 오적 300줄 보내와”

입력 | 2013-02-04 03:00:00

[허문명 기자의 사람이야기]
1970년 사상계 폐간 당시 편집장 김승균 남북민간교류협의회 이사장
“사상계는 1960년대 반독재 투쟁을 이끈 ‘지성의 빛’이었다”




‘오적’ 필화사건으로 폐간될 당시 사상계 편집장이었던 김승균 남북민간교류협의회 이사장. 김 이사장은 김지하 시인에게 오적에 대한 글을 써 보라고 아이디어를 준 사람이기도 하다. 김철주 씨 제공

유신헌법에 반대하며 반독재 민주화 투쟁을 하다 15년 형을 선고받았던 고 장준하 선생이 지난달 24일 무죄 선고를 받았다. 39년 만이다. 장 선생은 1974년 수감됐다가 병 보석으로 석방됐으나 이듬해 8월 경기 포천시 약사봉에서 숨진 채 발견돼 최근까지도 정치적 암살이라는 의혹이 계속되고 있다.

법원은 지난달 4일엔 민청학련 사건에 가담했던 김지하 시인에게도 무죄 선고를 했다. 그의 시 ‘오적’에 대해서도 법정 최저 형량인 징역 1개월의 선고유예 판결을 내렸다. 독재와 유신에 저항했던 1960, 70년대 민주화 역사가 새로 씌어지고 있다는 느낌이다.

장준하, ‘오적’ 모두 1960년대 지성계를 풍미한 월간지 ‘사상계’와 뗄 수 없는 인연이 있다. 장준하는 사상계 발행인이었으며 ‘오적’ 필화사건은 사상계 폐간을 불러왔다. 1970년 폐간 당시 편집장이던 김승균 남북민간교류협의회 이사장(74)은 김지하 시인에게 오적에 대한 글을 써 보라고 아이디어를 준 당사자.

1일 서울에서 그를 만났다. 평생 민주화 투쟁에 헌신해 온 김 이사장의 삶은 4·19혁명에서부터 1980년대에 이르는 민주화 고비마다 고문 수배 도피 투옥으로 점철됐다. 형형한 눈빛과 인터뷰 내내 흐트러지지 않는 꼿꼿한 자세, 겸손한 태도와 군더더기 없는 말투에서 숙연함이 느껴졌다.

―오적은 어떻게 실리게 됐나.

“사상계는 8명 편집위원이 기획회의를 하면서 주제를 정한 뒤 외부 필자에게 원고를 청탁하는 식으로 진행됐다. 5·16군사정변 9주년을 맞아 1970년 5월호를 특집으로 내기로 하고 4월 기획회의를 했다. 이런저런 이야기가 오가다 당시 부촌(富村)이던 동빙고동이 화제가 됐다. 집에 에스컬레이터를 달아 놓고 사는 ‘오적 촌’이 있다는 설이 시중에 파다하다는 거였다. 혁명공약에서 부정부패를 일소하겠다고 한 (쿠데타) 세력이 오히려 부패의 온상이 되고 있으니 국민의 실망과 비난이 드셌다. 편집장이던 나는 순간적으로 ‘기사가 된다’ 싶었다. 누구에게 원고를 청탁할까 생각하다 대학 때부터 알고 지내던 김지하를 떠올렸다.”

오적 청탁 닷새만에 300줄 장시 보내와

―당시 김 시인은 무슨 활동을 하고 있었나.

“서울대 문리대가 이끌던 1960년대 학생 운동을 주도한 뒤 졸업했는데 폐결핵 때문에 병원을 오가고 있었다. 당시만 해도 대중에게 알려진 유명인사는 아니었지만 재주가 뛰어나다는 것을 알 만한 사람은 다 알고 있었다. 나는 그에게 ‘오적촌이란 게 있다더라’며 담시(이야기시)정도로 생각하고 청탁했는데 장시(長詩)를 보내왔다. 청탁을 한 게 1970년 4월 7일이었는데 원고를 5일 만인 12일에 가져왔다. 300줄이나 되는 장시를 사흘 만에 썼다고 하길래 ‘역시 김지하’라고 생각했다.”

오적을 실은 사상계는 초판 5000부가 삽시간에 매진됐고 재판(再版) 요구가 빗발쳤다. 하지만 그게 마지막이 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

“처음엔 정부도 서점에서 책을 수거하고 판매를 금지하는 선에서 마무리 지으려 했는데 야당인 신민당이 당시 20만 부를 발행하던 기관지 ‘민주전선’ 1면에 ‘오적’을 전면 게재하면서 사태가 급변했다. 이듬해 4월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있었던 박정희 정부로서는 도저히 가만있을 수 없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결국 1970년 6월 초 김 시인을 포함해 발행인 부완혁(전 율산그룹 회장), 나, 민주전선 주간 김용성 네 사람이 붙잡혀 갔다.”

―어디로 끌려갔나.

“사무실에서 장부 정리를 하고 있는데 정보부에서 들이닥쳤다. 차에 태워져 머리가 처박힌 상태에서 어디론가 끌려가 뭇매를 맞았다. 당시 내가 김 시인을 서울대 병원에 피신시켜놓았는데 내게 병원 출입증이 있었다. 그게 들통 나면 김 시인도 잡혀갈까 봐 화장실 가서 삼켜 버렸다. 침이 안 나와 두꺼운 마분지를 삼키느라 혼이 나 화장실 똥물이라도 마셔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게 지금도 생생하다.”

김 이사장을 포함해 네 사람은 100여 일 뒤 모두 병보석으로 풀려나지만 사상계는 폐간 처분을 받아 통권 205호를 마지막으로 명맥이 끊기고 만다.

1960년대 사상계는 단순한 교양 잡지를 넘어 ‘인문의 샘’ ‘시대의 좌표’ ‘지성의 빛’이라는 찬사를 받았다. 2005년 ‘교수신문’이 분야별 학자 100명을 대상으로 한 심층 설문조사에서 광복 이후 저술서 1위로 꼽혔다. 사상계가 이렇게 큰 역사적 영향력을 갖게 된 비결은 무엇이었을까.

“당대 최고 지성들이 참여해 통일, 민주주의, 경제발전, 새 문화 창조, 민족적 자존심을 드높이자는 것을 편집 방향으로 내걸었던 것이 시대적 요구와 맞아떨어졌다고 본다. 이는 반공과 민주주의 사상에 투철했던 장준하 선생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민주주의만이 박정희 용서할 권리 있어

1952년 문교부 기관지 ‘사상’을 인수해 제호를 ‘사상계’로 바꿔 창간한 장준하는 초창기에는 부인과 둘이 원고 청탁 교정 제작을 도맡았다. 등짐을 져 나르며 직접 배본까지 했다고 한다. 그러다 1955년 1월 소설가 김성한(전 동아일보 편집인)이 주간으로 취임하고 편집위원들을 참여시키면서 체계를 갖춰 나갔다.

김 이사장은 “창간 때엔 3000부였던 것이 3년 만에 3만 부로 늘었다. 쪽수도 100여 쪽에서 400여 쪽으로 늘고 4·19혁명(1960년) 때에는 10만 부에 육박(9만7000부)하기까지 했다”라고 전했다. 당대 최고 부수이던 일간지 동아일보가 1955년 17만 부(2003년 장호순 순천향대 교수 논문)였다는 것을 감안하면 월간지로서는 엄청난 부수다.

장준하는 사상계 발간으로 자유언론투쟁에 앞장섰다는 공로로 1962년 막사이사이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그러다 정계에 진출하면서 1968년 발행인이 부완혁으로 바뀐다.

사상계에는 당대 최고 지성들이 편집위원으로 참여했다. 철학자 안병욱(전 숭실대 교수), 사학자 김준엽(전 고려대 총장), 한림대 석좌교수를 지낸 지명관과 양호민 등이 주간과 상근 편집위원으로 참여했고 나중에 국무총리를 지낸 김상협·유창순·현승종도 편집위원으로 활약했다. 1960, 70년대 당대의 지성으로 존경받던 함석헌 씨도 칼럼니스트로 이름을 날렸다.

김 이사장 역시 4·19혁명과 5·16군사정변을 거치며 1960년대 학생운동을 주도적으로 이끈 인물. 6·3(1964년 6월 3일 학생들의 한일회담 반대 운동이 절정에 이르자 정부가 계엄령을 선포해 무력으로 진압한 사건) 때 끌려가 고문으로 척추 뼈가 끊어지는 중상을 입기도 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1968년 사상계 편집장으로 들어갈 때에는 이미 두 차례 투옥으로 3년여의 옥살이를 한 터였다.

“반독재 민주화 투쟁에 언론이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생각에 1967년 시사통신사 기자를 거쳐 이듬해 사상계에 들어갔다. 당시 사상계는 정론직필로 이름을 떨치고 있어서 대학생들이 서로 들어가고 싶어 했던 매체였다.”

‘오적 필화사건’으로 그의 2년여 짧은 편집장 생활도 끝났다. 하지만 민주화 투쟁을 멈추지 않았다.

김 이사장은 출옥하자마자 1971년 민주청년협의회를 만들었다. 또 학계 언론계 법조계 종교계 지식인 100여 명이 참석하는 민주수호선언대회를 열고 민주수호국민협의회를 만들어 활동하다 그해 체포돼 구속된다. 1978년엔 긴급조치 위반으로 구속됐다가 집행유예로 나왔으나 이듬해 민주투쟁국민위원회 사건으로 다시 구속됐다.

도서출판 ‘일월서각’을 창립해 출판문화 운동을 하던 1986년엔 판매금지도서 전시회 개최로 수배됐다. 고 조영래 변호사와 함께 1987년 문민정부가 들어서기 전 야권 후보 단일화 협의회를 창립하며 일하기도 했으며 1989년 남북문화교류협의회 공동대표를 맡은 이후 현재까지 남북 민간 교류에 앞장서고 있다.

“김 이사장은 진정한 민주화 영웅”

그에게 “박정희 전 대통령을 용서했느냐”라고 묻자 이런 단호한 대답이 돌아왔다.

“민주주의만이 그를 용서할 권리가 있다. 개인이 용서할 권리는 없다.”

6·3 학생운동의 주역으로 함께 활동하며 50년 우정을 이어오고 있는 최동전 사단법인 푸른한국 이사장은 “김 이사장은 그의 좌우명 우공이산(愚公移山)대로 민주화의 고비마다 정말 필요하고 중요한 단체를 만들어 중심 역할을 했다. 하지만 한번도 공을 내세운 적이 없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민주화의 영웅”이라고 말했다.

▶ [채널A 영상] 김지하 “기쁘지도 슬프지도 않고…”

● 사상계 창간에서 폐간까지

1952년 8월
문교부 산하 국민사상연구원(원장 백낙준)의 기관지 ‘사상’ 발행.
1953년 4월 월간 ‘사상지’ 창간호 나옴.
1957년 3월호 함석헌 ‘한국 기독교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기고를 시작으로 5월호 윤형중 신부가 ‘함석헌 선생에게 할 말이 있다’ 반박, 6월호에 함석헌 ‘윤형중 신부에게는 할 말이 없다’로 재반박. 당시 지상 논쟁으로 발행 부수가 3만 부대로 늘어남.
1958년 8월호 함석헌의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 필화 사건으로 발행인 장준하 함석헌 연행. 판매 부수 5만∼8만 부로 급상승.
1959년 자유당 정권의 국가보안법 통과(1958년 12월)에 대한 저항으로 2월호 ‘무엇을 말하랴, 민권(民權)을 짓밟는 횡포(橫暴)를 보고’라는 제목의 권두언을 백지로 냄.
1963년 광고 탄압으로 서점으로부터의 반품 사태와 세무 사찰.
1964년 ‘한일회담의 제문제’라는 특집 통해 한일협정 반대.
1965년 ‘신 을사보호조약의 해부’라는 제목으로 긴급호 발간.
1968년 1월 부완혁 인수.
1970년 5월 ‘오적’ 필화 사건으로 폐간.
2000년 4월 동방미디어주식회사 CD-ROM 사상계 발간.
2001년 8월 ‘디지털 사상계 준비모임(http://sasangge.com)’ 출범.
● 김승균의 삶

1957년 경북대 사대부고 졸업.
1961년 성균관대 동양철학과 재학시절 학생운동을 이끌다 5·16군사정변 후 구속됨. 10년 징역 선고 받은 이듬해 형 집행면제로 출감.
1964년 한일협정 반대 투쟁으로 구속됐다 석방됨.
1965년 대학 졸업.
1968년 사상계 편집장.
1970년 ‘오적’ 필화 사건으로 구속됐다 석방된 뒤 민주청년협의회 발기위원장.
1971년 민주수호국민협의회 사무총장으로 있다가 10월 전국에 위수령이 내려지면서 수배되어 6년간 도피 생활.
1977년 체포. 징역 1년 집행유예 2년.
1978년 도서출판 일월서각 창립. 긴급조치 위반으로 구속됐다가 선고유예.
1979년 민주투쟁국민위원회 사건으로 구속. 징역 3년 집행유예 5년으로 석방.
1982년 사회과학 도서출판사 모임 금요회 대표. 민주언론운동협의회 공동대표.
1983년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 상임지도위원.
1984년 민족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 민주통일위원장.
1985년 서울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 의장, 출판문화운동협의회 대표.
1986년 판매금지도서 전시회 개최로 수배. 민주화운동유가족협의회 간사장.
1987년 야권 후보 단일화 추진협의회 창립.
1988년 한겨레민주당 창당 중앙당 재정위원장.
1989년 남북문화교류협의회 공동대표.
1990년 남북교역 주식회사 설립, 남북 간 신문 잡지 단행본 DVD 등 출판물 교류 사업.
1995년∼현재 사단법인 남북민간교류협의회 이사장.

허문명 기자 angelhu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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