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朴 때문에…민주, 20년간 집권 못할수도” “진보좌파 정책 제대로 포용하면 보수정권 20년은 더 갈 것”
3일 서울 종로구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만난 우석훈 성공회대 외래교수는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의 복지 정책은 유시민 씨가 보건복지부 장관을 하면서 국민연금 개혁을 할 때보다 더 진보적”이라고 평가했다. 박영대 기자 sannae@donga.com
저서 ‘88만 원 세대’로 2030세대의 열광을 끌어냈던 우 교수는 “이제 88만 원 세대가 아닌, 150만 원 세대가 되자. 청년들이 행복해야 세상이 행복해진다”며 그의 표현대로 ‘바람잡이’에 나섰다.
2030세대는 지난 대선에서 민주당의 최대 지지층이었고, ‘88만 원 세대 담론’은 문 후보가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과의 대결을 끝까지 박빙으로 끌고 갈 수 있었던 큰 힘이었다.
진보진영의 대표적 논객인 우 교수를 4일 서울 종로구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대통령직인수위원회가 있는 금융연수원에서 불과 50m 떨어진 곳이었다.
박 당선인의 경제정책을 평가해 달라는 첫 질문에 대한 대답은 예상 밖이었다. 그는 “진보가 10년간 고민했던 어젠다를 박 당선인이 가져가 버렸다. 좋은 경제를 만들고자 하는 의지만큼은 확실하다”고 평가했다. 이어 “당선인이 (진보좌파 정책을) 포용한다면, 민주당은 앞으로 20년 가까이 집권하지 못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공교롭게도 그가 경제학자로 지난 수년간 줄기차게 주장한 △실물산업 부처로의 통상기능 이관 △지하경제 양성화 △사회간접자본(SOC) 예산감축 등은 박 당선인이 채택해 인수위가 다듬고 있는 주요 정책들이다.
―박 당선인의 공약, 어떻게 보는가.
―박 당선인이 잘할 것 같나.
“좋은 경제체제를 만들고 싶은 의지가 당선인에게 있다는 것만큼 확실하다. 핵심은 과정을 얼마나 잘 가져가느냐에 있다. 지금 보기에 당선인의 가장 큰 약점은 ‘과정’이다. 결정은 본인이 하더라도 심포지엄, 공청회 같은 토론의 장을 열어 다양한 얘기를 듣는 게 중요하다. 과정 없이 가는 게 효율적으로 보이겠지만, 길게 보면 논란을 거치는 게 정책실행의 위험을 줄이는 길이다. 과정이 생략된, 획일적인 선진국은 세상에 없다. 당선인의 포용력에 따라 민주당은 앞으로 20년 가까이 집권하지 못할 수도 있다.”
―최근 박 당선인의 인사를 놓고 문제가 있다는 지적이 있다.
“인사를 지금 망치는 게 차라리 약이 될 수 있다. 이명박 대통령의 인사를 보면 반대 진영과 ‘기세 싸움’을 한다는 느낌이 있었다. 지금 밀리면 다 밀리니 끝까지 버티겠다는…. 박 당선인은 그보다는 유연해 보인다. 인사만 보면 당선인은 정치인이라는, 정치를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복지는 원래 우파가 하는 것이다. 복지가 현재의 체제를 유지하는 비용이라고 본다면 오히려 우파에게 맞는 개념이다. 독일에서 사회복지를 처음 도입한 사람이 비스마르크이고 오늘날의 프랑스 복지를 설계한 사람이 우파인 샤를 드골 아닌가. 한국이 궁극적으로 ‘완전고용’으로 가기 어렵다면, 결국 복지를 보다 완벽히 설계해서 문제를 해결하는 게 맞지 않나 싶다. 노인 복지나 저출산 복지는 어느 정도 된 것 같은데 아직 청년들을 위한 복지는 공약에서 찾기 힘들다. 지금도 (박 당선인의) 20, 30대 지지율이 30% 나오는데, 여기서 청년들의 표심을 더 얻으면 새누리당은 그때부터 영구집권이다.(웃음)”
―예산이 낭비될 우려가 만만치 않다.
“시멘트 쏟아 붓고 보도블록 까는 게 더 아깝지 않나. 이제는 누가 집권해도 선택적 복지냐, 보편적 복지냐를 두고 논쟁할 시기는 아닌 것 같다. 저출산 문제를 풀었다는 프랑스에서도 어떤 정책이 해결의 단초가 됐냐고 물어보면 답을 못한다. 이런저런 지원책을 자꾸 던지다 보니 어느 날 그런 복지정책이 누적돼 언제부턴가 자연스럽게 한 집에 아이를 둘씩 낳게 됐다고 한다. 저출산, 고령화, 청년실업 같은 문제들은 원인이 다양하고 사람마다 처한 상황이 복잡하다. 도깨비 방망이처럼 어떤 정책으로 단박에 풀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당선인은 지하경제 양성화와 세출 구조조정으로 재원을 마련한다는데….
“한국사회 곳곳에 끼어 있는 잘못된 관행들이 다 지하경제다. 뇌물 주고 흥청망청 술 먹고 룸살롱 가는 게 다 지하경제 아닌가. 그렇게 쓴 돈을 바탕으로 내려지는 의사결정 내용이 좋을 리 없다. 그래서 ‘밤에 술 먹고 하는 사람들’은 박근혜를 이길 수 없다. 지하경제 양성화에 성공한다면, 세원 문제 해결을 떠나 부패의 고리를 끊는다는 의미가 있다. 김영삼 정부의 금융실명제, 노무현 정부의 성매매특별법보다 더 큰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당선인의 저 두 가지 공약이 제대로만 실현된다면 복지자금 조달은 가능하다고 본다. 박 당선인이 약속한 연간 23조 원까지는 몰라도 20조 원 가까운 돈을 마련할 여력은 있다.”
―결국 어떻게 실천할지가 문제다.
“흔히 경제를 기획재정부나 공정거래위원회가 맡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다. 1998년 외환위기 때 한국 최대 기업집단이 법원이었던 적이 있다. 실제로 지금도 법정관리를 통해 법원이 좌지우지하는 기업들이 많지 않나. 당선인이 법질서 강조한다고 하는데, 경제민주화도 법 강조하면서 있는 그대로 하면 된다. 과거 골프장 건설 반대운동에 몸담은 적이 있는데, 가만 보니 이건 시민단체가 아니라 검사가 해야 할 일이 아닌가 싶었다. 법무부에 경제연구소를 하나 만들면 어떨까 한다. 괜히 상법 건드리지 말고 형사법으로 접근하자는 거다.”
―평소 외교통상부에서 통상기능을 분리하자고 주장했는데, 당선인이 실현했다.
“두 번 놀랐다. 인수위가 기능 분리를 발표할 때까지 아무도 감을 잡지 못했다는 게 놀라웠고, 당선인 본인이 2004, 2005년에 통일외교통상위원회 활동을 하면서 분리의 필요성을 깨달았다고 말하는 걸 듣고 다시 한 번 놀랐다. 10여 년 전 경험을 꺼내 들면서 정책으로 옮기는 걸 보니 ‘장난이 아니다’라고 느꼈다. 흔히 박 당선인이 경제를 잘 모른다고들 하는데, 그렇게 생각했다가는 된통 당할 것 같다. 괜히 ‘나는 꼽사리다’(우 교수가 진행했던 팟캐스트 인터넷 방송)에서 뭐라고 했으면 큰일 날 뻔했다.”
―통상기능을 실물산업 부처로 이관하는 게 맞을까.
“외교통상부 내에선 자신들이 통상 전문가라고 하는데, 실제 외교부에 전문가는 별로 없다. 통상이 과거에 비해 외교부 안의 변방이라는 이미지는 줄었지만 그래도 공관 나가기 전 잠시 머무는 곳이라는 게 현실 아닌가. 김현종 전 통상교섭본부장이 쓴 자서전을 보니 통상만 할 사람을 키웠다고 하는데, 그건 본인 생각이고…. 세계가 통상으로 경제전쟁을 하면서 경제부처에서 통상을 맡는 게 요즘 흐름인 것 같다. 유럽에서 프랑스가 외교를 제일 잘 한다는데, 프랑스 외교부는 통상 안 한다. 산업통상자원부로 가면 수출업무와 연계할 수도 있고 KOTRA 도움도 받을 수 있다. 기업과 정부의 의사소통도 원활해질 것이다. 동시다발적 자유무역협정(FTA) 체결 전략은 이제 끝났다고 본다.”
―여전히 경제가 중요한데, 경제성장률 목표가 안 보인다.
“성장률은 결과로 나오는 것이지, 정책 목표로 제시하면 안 된다. 성장률이 목표가 되다 보니 노무현의 2만 달러 경제, 이명박의 747 전략이 나오지 않았나. 목표 성장률을 달성하기 위해 역으로 정책을 강구하는 이상한 상황이 펼쳐졌다. 당선인이 성장률 목표를 제시하지 않은 건 잘했다고 본다. 경제구조가 튼튼해지고 불균형이 해소되면 의외로 높은 성장을 거둘 수 있다. 수출 주도의 경제가 고용을 생각하는 내수 경제로 전환된다면 5% 이상의 고성장도 전혀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창조경제를 한다며 미래창조과학부를 신설했다.
“토건이 아닌 연구개발(R&D)로 경제를 이끄는 건 맞다. R&D를 제대로 하려면 김대중 정부 때 만들어졌던 ‘프로젝트 베이스 시스템(PBS)’부터 없애야 한다. 연구소가 프로젝트를 따와 그 안에서 인건비를 충당하는 PBS가 도입되다 보니 황우석급 매니저 연구원만 왕 노릇 하면서 몇 억씩 먹고 그 밑에 연구원은 비정규직 처지에 시달린다. 미래가 불안하면 선택은 두 가지다. 다른 직업을 찾거나, 비밀자료를 빼내 팔거나. R&D든, 중소기업 정책이든, 취업대책이든 시설투자가 아닌 사람에 대한 투자, 인건비 위주로 돈이 나가야 한다. 낭비성이라고들 하는데 국민경제를 돌리는 재정지출 효과라도 있다. 대기업에 들어가는 설비투자 지원이 전후방 연관효과가 있다고 하는데, 결국 다 거짓말 아니었나.”
―새 정부가 나아가야 할 경제의 방향은….
“제조업을 버리면 안 되지만, 자본집중형 경제는 한계에 다다랐다. 이제 삼성 현대 같은 기업을 못 만든다면 협동조합으로 대표되는 분산형 경제가 답이다. 제조업과 토건경제를 대체할 틀이 될 수 있다. 관광산업 키우자고 하는데, 경기 나쁠 때 제일 먼저 망하는 게 관광이다. 이제 세상을 바꿀 혁신적인 미래는 없다. 작은 단위로 지역에 뿌리내리는 건강한 경제를 만들자는 데는 좌우 모두 동의할 수 있지 않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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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석훈 교수 프로필
△1968년 서울 출생 △1990년 연세대 경제학과 졸업
△1996년 프랑스 파리10대학 경제학 박사 △에너지관리공단 기후변화협약대책단 팀장
△국무조정실 산업심의관실 전문위원 △2006년 성공회대 외래교수(현)
△저서: ‘88만 원 세대’ ‘샌드위치 위기론은 허구다’ ‘한미 FTA 폭주를 멈춰라’ 등
이상훈 기자 januar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