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 합작연극 ‘나에게 불의 전차를’ ★★★★
한일합작 연극 ‘나에게 불의 전차를’에서 가장 감동적인 순간을 선사하는 오무라의 독백 장면을 연기하는 가가와 데루유키. 일본 유명 가부키 배우의 버려진 아들로 장성해서 배우로 성공한 뒤 다시 아버지의 가업을 잇는 운명을 묵묵히 짊어진 그의 실제 삶이 고스란히 오버랩되는 장면이기도 하다. 국립극장 제공
하지만 이후 그의 연극은 시곗바늘을 뒤로 돌리면서 한발 두발 한국으로 다가섰다. ‘적도 아래의 맥베스’(2010년)는 태평양전쟁 당시 태국이 무대지만 주인공들은 1945년 도쿄전범재판에 회부돼 처형된 조선인 포로감시원들이었다. ‘봄의 노래는 바다에 흐르고’(2012년)에서 첫 한국 상륙이 이뤄졌다. 1944년 전라도의 한 섬을 무대로 이발소를 운영하는 홍길네 가족과 섬 주둔 일본군들 간의 애증을 다뤘다.
그리고 1월 30일∼2월 3일 서울 장충동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에서 공연한 ‘나에게 불의 전차를’을 통해 드디어 서울(경성)에까지 입성했다. 지난해 11월과 1월 일본 도쿄와 오사카에서 먼저 순회공연을 마친 이 한일합작 연극은 1924년 일제 치하의 경성과 그 인근 지방 소도시를 무대로 한다.
일제강점기 조선 문화에 심취했던 야나기 무네요시를 모델로 한 나오키는 조선 민중을 수탈하는 일본의 야만적 식민지정책을 비판하면서 조선인에게서도 천대 받던 도예와 남사당놀이의 가치를 알아본다. 자신들의 운명에 순응적이던 이순우는 나오키를 만나면서 점차 뚜렷한 자의식을 갖추게 되고 구경거리에 불과하던 남사당놀이에 책임 윤리와 감동적 미학을 불어넣게 된다.
이 전경에만 몰입하다 보면 자칫 ‘양심적 일본인에 의해 계몽된 한국인’이라는 도식에 빠질 수 있다. 하지만 연극에는 이를 차단하면서 짙은 감동을 담보하는 후경이 존재한다. 그 주인공은 이순우와 나오키의 선배 세대인 고대석(김응수)과 오무라(가가와 데루유키)다. 남사당패 출신인 두 사람은 조선총독 사이토의 암살을 기도한다. 고대석이 이를 주도하고 경성에서 ‘불야성’이란 술집을 운영하는 오무라는 자금과 정보를 대는 관계다.
극 표면에 드러나는 오무라는 조선인의 피를 빨아먹는 전형적인 일본 하층민이다. 일본에서 결혼한 그에게서 버림받은 아들로 조선총독부 관료가 돼 나타난 아키히코(다카다 쇼)가 그 살아있는 증인이다. 한쪽 다리를 저는 오무라 주변에는 일본 하층민 출신으로 일확천금을 노리고 조선으로 건너온 지리멸렬한 인생들로 가득하다.
하지만 2막 후반부에 이르러 오무라가 자신에게 저주의 말을 퍼붓는 아들에게 자신이 왜 절름발이가 됐는지를 털어놓는 순간 극장은 울음바다가 된다. 첫사랑을 잊지 못해 처자식을 버리고 조선으로 돌아왔다가 3·1운동 때 제암리 학살로 첫사랑과 함께 자신의 오른 다리도 잃었지만 “쏘지 마세요, 나는 일본인입니다”를 외치며 목숨을 구걸했다고 고백한다.
이런 감동요소는 차승원에게도 적용된다. 극 후반부 이순우는 자신의 죄를 씻기 위해 목숨을 걸고 2m 높이의 밧줄 위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 묘기를 펼친다. 이는 영상매체에만 출연하던 차승원이 대극장 연극에 도전하는 것과 묘한 공명작용을 일으킬 수밖에 없다.
극 중 캐릭터가 정의신 연극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인물이라서 식상할 수도 있다. 눈물 나는 신파와 희극적 요소를 무리하게 섞었다는 비판도 가능하다. 한국어 대사가 제대로 들리지 않는다는 문제도 있다. 하지만 한국을 사랑하는 일본 배우 구사나기를 기용한 것을 포함해 현실과 극을 넘나드는 이런 연극적 장치로 인해 진한 감동을 획득했다. 2900석 규모 극장에서 6회 공연이 전석 매진되고 기립박수를 끌어낸 원동력이다.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