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카미야 요시부미 일본국제교류센터 시니어펠로 전 아사히신문 주필
요도호는 일단 후쿠오카공항에 착륙해 급유한 뒤 다시 이륙해 평양으로 향했지만 결국 서울 김포공항에 착륙했다. 평양에 도착한 걸로 속은 것이다. 하지만 속임수를 알아채고 분노한 범인들은 승무원과 승객 백몇십 명을 위협하며 김포공항에서 긴박한 하룻밤을 보냈다.
해가 밝은 4월 1일, 마침 나는 아사히신문 도쿄 본사 입사식에 참석해 염원하던 신문기자가 됐다. 당연히 나는 당시 사건 보도에 참여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도쿄와 서울, 평양에 걸쳐 벌어진 이 사건으로 신문사가 시끄러웠던 가운데 내 기자 인생이 시작된 것은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복선이 깔려 있었던 셈이다. 요도호가 평양에 도착해 범인들이 망명에 성공한 것은 그 이틀 뒤의 일이었다.
다음 해인 1979년. 생각지도 못했던 기회가 찾아왔다. 당시 방위청 장관의 첫 방한이 실현됐고 내가 취재에 동행했다. 판문점과 제3땅굴도 방문해 남북 간의 긴장감을 직접 체험했다. 다음 해 9월에는 담당하고 있던 자민당 의원 그룹이 북한을 방문했다. 나도 동행해 평양을 방문했고 북한 쪽에서 판문점을 둘러볼 수 있었다.
당시 서울에서 의미는 잘 몰랐지만 거리의 간판에 적힌 한글을 어떻게든 읽을 수 있었던 점이 무척 기뻤다. 평양에서는 ‘주체’와 ‘위대한 수령님’을 찬양하는 표어를 여기저기서 알아볼 수 있었다. 떠듬떠듬하게라도 한글을 배운 덕분이었다. 서울과 평양에서 똑같은 한글을 보면서 남북 간의 거리는 멀지만 역시 같은 민족이라는 당연한 사실을 새삼 실감할 수 있었다.
박정희 대통령이 측근의 총탄으로 비명에 쓰러진 것은 내가 서울을 방문한 뒤 2개월 반 정도 지났을 때의 일이다.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비극에 놀랄 따름이었다. 보기 드문 권력 장악력과 선견지명을 겸비한 독재자를 한 번은 만나보고 싶다는 개인적인 희망이 사라지는 순간이기도 했다.
평양에서는 기력이 넘치는 김일성 주석의 모습을 직접 볼 수 있었다. 노련한 그는 평화에 대한 희망을 말했지만 실은 그 순간에도 비밀리에 핵개발의 야망을 불태우고 있었을 것이다. 일본인 납치도 시작됐을 즈음이지만 그런 사실은 알 도리가 없었다. 주석의 아들이 무대 위로 올라선 것은 다음 달 열린 노동당 대회에서였다.
앞서 북한에서는 1년여 전에 주석의 손자인 김정은 씨가 권력을 승계했다. 민주화된 지 벌써 사반세기가 지난 한국에서는 박 대통령의 사랑하는 딸이 곧 최고 권력의 자리에 오른다. 눈 깜짝할 사이에 흘러간 43년이었지만 역시 긴 세월이었다.
이 세월 동안 남북 간에는 어떤 일들이 있었을까. 랑군 사건(북한의 ‘버마 랑군’ 폭탄테러·현 미얀마 양곤)이 터진 것은 내가 서울 유학을 마친 다음 해인 1983년이었다. 그 4년 뒤에는 대한항공 여객기가 폭파돼 많은 사람이 희생됐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평양을 방문해 역사적인 남북 정상회담을 실현시킨 것은 2000년이었다. 이때만큼은 일본인도 TV 앞에 달라붙어 평화의 희망을 키웠지만 밀월은 오래가지 못했다. 계속된 핵실험과 미사일 발사, 천안함 폭침, 연평도 포격…. 지난해 말에 성공한 장거리탄도미사일 발사에 이어 지금 다시 북한의 젊은 권력자는 핵실험 준비로 주위를 위협하고 있다.
세계사를 돌이켜보면 1990년 전후에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옛 소련도 붕괴돼 냉전시대가 막을 내렸다. 내게는 기자생활 전반이 냉전시대였고, 후반이 냉전 이후였던 셈이다. 과거 ‘한강의 기적’을 실현해 북한을 크게 따돌린 계기를 만든 인물이 박 대통령이라면 옛 소련이라는 방패를 잃고 점점 곤경에 떨어지면서 핵과 미사일 개발에 국운을 걸고 있는 나라는 지금의 북한이다.
와카미야 요시부미 일본국제교류센터 시니어펠로 전 아사히신문 주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