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임 부부가 임신에 성공하기 위해서는 인공수정에서부터 시험관 시술까지 짧게는 6개월, 길게는 수년이 걸린다. 시간도 시간이지만 이루 말할 수 없는 비용이 든다. 시술 때마다 조마조마한 마음고생도 심하다.
그런데 그런 과정을 거친 난임 부부들이 임신에 성공하면 “자연임신 했어요”라고 말하고 다니는 경우가 많다. 딸 셋을 모두 시험관 시술로 얻은 우리 부부도 그랬다.
2006년 당시 첫딸을 시험관 시술로 임신했을 때 양가 부모님들께조차도 “시험관 시술을 했습니다”라고 말씀드리지는 못했다. 돌이켜보면 우리 사회의 시험관 시술에 대한 몇 가지 편견이 부담스러웠기 때문이리라.
그래서 난임 부부들은 주변에 시험관 아기라는 사실을 쉬쉬하거나 오히려 누가 묻지도 않았는데 “자연임신이에요”라고 둘러대는 경우도 종종 있다. 첫째아이 임신 사실을 안 뒤 우리 부부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태아보험에 가입하려다 그런 생각이 바뀌었다. 태아보험은 임신 중에 가입하는 상품으로 출산 전후의 여러 질환, 아기의 선천이상, 출산 후 인큐베이터 비용 등에 대한 보장상품이다. 월 몇만 원짜리를 하나 들어 놓으면 든든해서 예비 부모들에게 인기가 높다.
나 역시 보험사에 연락을 했다. 보험설계사는 물었다. “자연임신이신가요, 시험관 아기인가요.” 시험관 시술을 받았다고 하자, 상대방의 친절했던 말투가 갑자기 싸늘하게 식었다.
가입이 안 된다는 거다. 보험사 직원은 “자연임신된 아이보다 건강이 취약할 가능성이 높아 가입이 안 된다”고 말했다. 오랫동안 약관이 그랬다는 설명만 되풀이했다.
하루하루 순응하며 살기 바빴던 내 가슴에 정의감이 불끈 솟았다. 태아보험, 그까짓 것 들지 않으면 된다. 그러나 세상이 이렇게 시험관 아기를 차별한다면, 우리 아기뿐 아니라 시험관 시술로 태어나는 수많은 아기가 앞으로도 계속 차별당할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보건복지부 통계에 따르면 연간 평균 1만 명 이상의 시험관 아기가 태어난다.
국가인권위원회에 민원을 넣었다. 사실 이때까지는 초보 아빠의 오기여서 결과를 내심 크게 기대하지 못했다. 민원을 넣은 후 곧바로 민원을 넣었다는 사실조차 잊고 말았으니 말이다.
며칠 후 담당 조사관으로부터 자초지종을 묻는 전화가 오고 정식으로 조사를 시작해 결과를 알려주겠다는 말을 듣자 정신이 번뜩 들었다. 아이고, 내가 뭔가 일을 벌인 모양이구나. 이후 인권위는 보험협회와 보험사들에 관련 자료를 요청하고 조사를 진행했다. 인권위는 보험사들에 시험관 아기를 차별하지 말 것을 권고했다. 또 시험관 아기라고 거부하지 않는 다른 보험사의 태아보험을 내게 추천해 주는 것으로 ‘시험관 아기 인권침해 민원’은 종료 처리되었다.
시험관 아기의 보험가입을 거부했던 그 보험사의 약관을 고쳐서 보란 듯이 가입하고 싶었지만 배 속에 있던 아이한테 약관 바뀔 때까지 몇 달 크지 말고 기다리고 있으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 아닌가.
물론 이 모든 변화가 초보 아빠의 오기로 집어넣었던 인권위의 민원 한 통으로 벌어진 일은 아닐 것이다. 시험관 시술이 보편화되고 있는 만큼 보험사도 전략을 바꿨는지 모른다. 하지만 당시의 경험은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다. 더욱 당당하게 사람들에게 말하고 다닌다. 아이가 잘 안 생겨서 시험관 아기로 소중한 아이들을 얻었다고. 우리 부부가 그랬듯이 난임이나 시험관으로 마음고생하고 있을 예비부모들을 위해서 말이다.
《 30대 중반의 광고기획자인 필자는 여섯 살 큰딸 보미와 세 살 유나·지우 쌍둥이를 키우는 대한민국의 가장이다. 》
이경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