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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행복

입력 | 2013-02-08 03:00:00


행복
―방민호 (1965∼)

우리가 아무것도 가지지 않았을 때
옷 없는 짐승들처럼 골목 깊은 곳에 단둘이 살 때
우리는 가난했지만 슬픔을 몰랐다
가을이 오면 양철 지붕 위로 감나무 주홍 낙엽이 쌓이고
겨울이 와서 비가 내리면 나 당신 위해 파뿌리를 삶았다
그때 당신은 내 세상에 하나뿐인 이슬 진주
하지만 행복은 석양처럼 짧았다
내가 흐느적거리는 도시 불빛에 익숙해지자
당신은 폐에 독한 병이 들어 내 가슴속에 누웠다
지금 나는 거울에 비친 내 얼굴에 침을 뱉는다
시간이 물살처럼 흐르는 사이
당신을 잃어버린 내게 남은 건
상한 간과 후회뿐
그때 우린 얼마나 젊고 아름다웠나
우리가 아무것도 가지지 않았을 때
백열등 하나가 우리 캄캄한 밤을 지켜주던 나날

‘우리가 아무것도 가지지 않았을 때/옷 없는 짐승들처럼 골목 깊은 곳에서 단둘이 살 때’! 가진 거라고는 서로의 몸뚱이밖에 없어도 행복했던 젊은 날의 지순한 사랑을 애달프게 돌아보는 시다. ‘가을이 오면 양철 지붕 위로’ 떨어져 쌓이는 감나무 낙엽의 주홍으로 붉은 빛, 양철 지붕에 낙엽 떨어지는 소리, 그리고 비 오는 소리, 비 오는 겨울날의 파뿌리 삶는 냄새. 파뿌리만 삶았겠는가. 생강이니 대추도 넣었겠지. 그 냄새! 모든 감각이 그 시절을 사무치게 기억하고 있다. 너무나 짧았던 아름다운 시간을!

‘지금 나는 거울에 비친 내 얼굴에 침을 뱉는다’, 이 직설적인 진술! 그때 무능력해서, 돈을 못 벌어서, 가난해서, ‘폐에 독한 병이 든’ 당신을 죽게 만들었다는 처절한 가책과 회한이 독자의 가슴을 후벼 판다. 행복이라는 말은 어쩐지 슬프다. 아니, 차라리 불안하다. 죽음으로 끝난 ‘석양처럼 짧았’던 사랑의 행복이라니. 오랜 시간이 흘러도 화자가 헤어나지 못하는, 가난과 사랑과 청춘의 애수에 찬, 행복의 으스름.

황인숙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