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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횡설수설/정성희]영국 무상의료의 그늘

입력 | 2013-02-09 03:00:00


‘해리포터’의 작가 조앤 K 롤링은 감수성이 풍부한 어머니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다. 롤링의 아버지는 공장 책임자로 일하는 블루칼라였지만 어머니 앤은 책과 전원생활을 사랑하는 여성이었다. 앤은 조앤이 13세가 되던 해 다발성경화증에 걸려 손을 심하게 떨고 종국엔 휠체어 신세를 지게 된다. 결국 그는 딸의 성공을 보지 못하고 45세에 사망했다. 앤은 의사는커녕 방문 간호사의 돌봄조차 제대로 받지 못하고 10년을 투병했다. 이 과정을 안타깝게 지켜본 조앤은 2010년 다발성경화증 연구를 위한 기금으로 1000만 파운드를 에든버러대에 기부했다.

▷영국 국민건강보험(NHS)은 영국이 런던 올림픽 개막식에서 퍼포먼스를 선보일 정도로 자부심을 갖고 있는 제도다. ‘요람에서 무덤까지’ 보장한다는 베버리지 보고서에 따라 1948년 도입했다. 가입자가 내는 보험료가 아니라 100% 세금으로 운영된다. 전 국민이 빈부(貧富)에 관계없이 아프면 진료를 받을 수 있다면 정말 이상적이다. 문제는 의료의 질(質)이다. 영국 병원들은 모두 국영이며 의사는 공무원이다. 환자들이 의사에게 진료를 받으려면 대기자 명단에 이름을 올리고 짧게는 6개월, 길게는 2∼3년을 기다려야 한다. 조앤의 어머니도 이런 식으로 하다가 치료를 제대로 받지 못하고 사망했다.

▷영국 정부는 6일 스태퍼드셔에 있는 스태퍼드 병원에서 2005년부터 4년간 최소 400명, 최대 1200명의 환자가 제대로 진료 받지 못해 사망했다는 ‘스태퍼드 병원 진상조사 보고서’를 발표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거동이 힘든 환자가 침대에서 소변을 보고 일부 환자들은 음식과 물을 제때 공급받지 못해 꽃병의 물을 마셨다. 21세기 문명국가에서 일어난 일인지 귀가 의심스럽다. 2004년에도 영국에서 40대 간호사가 회생 가능성이 희박한 고령 환자에게 마취제를 투여하고 산소호흡기를 떼어내는 방식으로 죽음을 유도해 살인 혐의로 재판에 회부됐다. 이 간호사는 “병상을 빨리 비우기 위해 그랬다”고 말했다.

▷스태퍼드 병원 사건은 무상의료 자체보다는 무상의료 개혁 과정에서 불거진 일이다. 병원은 재정지출 등에서 NHS가 요구하는 일정 기준을 충족하면 정부 통제를 받지 않고 자율운영을 할 수 있다. 이 기준을 맞추기 위해 2006∼2007년 병원 예산 1000만 파운드를 깎고 의료진 150명을 해고했다. 그 피해가 고스란히 환자에게 돌아갔다. 스태퍼드 병원은 한계에 봉착한 영국 NHS의 현주소를 잘 보여준다. 데이비드 캐머런 영국 총리가 “영국 의료제도의 끔찍한 실패에 사과한다”고 했으니 원죄가 무상의료에 있음을 시인한 셈이다. 선거 때만 되면 무상의료를 외치는 우리나라 정치인들도 영국의 의료제도를 공부할 필요가 있다.

정성희 논설위원 shchu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