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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미석의 詩로 여는 주말]‘어머니와 설날’

입력 | 2013-02-09 03:00:00


‘어머니와 설날’
김종해(1941∼)

우리의 설날은 어머니가 빚어주셨다
밤새도록 자지 않고
눈 오는 소리를 흰 떡으로 빚으시는

어머니 곁에서
나는 애기까치가 되어 날아올랐다
빨간 화롯불 가에서
내 꿈은 달아오르고
밖에는 그 해의 가장 아름다운 눈이 내렸다

매화꽃이 눈 속에서 날리는
어머니의 나라
어머니가 이고 오신 하늘 한 자락에
누이는 동백꽃 수를 놓았다

섣달 그믐날 어머니의 도마 위에
산은 내려와서 산나물로 엎드리고
바다는 올라와서 비늘을 털었다

어머니가 밤새 빚어놓은
새해 아침 하늘 위에
내가 날린 방패연이 날아오르고
어머니는 햇살로
내 연실을 끌어올려 주셨다


김준근의 ’설날 널뛰기’.

문열면 큰일 날 것처럼 난리치다 어느 날 개방한 조선에서 외국인들이 수집한 품목 중 하나가 풍속화였다. 부산에 이어 1880년 개항한 함경도 원산에는 갑자기 밀려드는 주문에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화가가 있었다. ‘수출 풍속화’ 분야에서 독보적 기량을 떨치게 된 기산 김준근이었다. 이름 없는 어촌이 외세에 의해 마지못해 국제항으로 변신하고, 양반네는 거들떠도 안 보던 환쟁이의 저잣거리 그림을 이방인들이 소중히 거두기 시작했다. 화원도 아닌 평민 출신 화가의 작품은 알려진 것만 1570점이 넘는다. 다작 덕분에 그는 해외 박물관에서 가장 많은 작품을 소장한 조선의 풍속화가로 손꼽힌다. 요즘 갤러리현대에서 열리는 ‘옛 사람의 삶과 풍류’전에 등장한 ‘설날 널뛰기’도 그의 솜씨다. 치맛자락 휘날리며 공중으로 힘차게 뛰어오른 젊은 여인의 모습에서 한 해를 시작하는 생기와 활력이 느껴진다.

기산이 붓으로 한 세기 전 정초 풍경을 그려냈다면 김종해 시인은 글로 유년의 설날을 핍진하게 되살린다. 육신은 궁핍했으나 영혼은 덜 궁핍했을 시절에 어머니가 빚어주신 설날의 추억이다. 이젠 보기 힘들게 된 정경이라 생각하면 향수마저 느껴질 정도로 빠른 속도의 세월이다. 잃어버린 것은 설날의 추억만이 아니라 내 마음속 자연의 풍경이기도 하다. 화롯불이 어째서 어린 꿈으로 피어오르는지, 산과 바다는 어떻게 조그만 밥상에 내려앉는지, 그리하여 설날 아침 문 열고 나가 본 하늘이 온통 나의 것이며 그 조물주가 어머니였는지를.

짧은 설 연휴의 시작이다. 새해의 각오가 요란했던 만큼 또 시들해지기 시작한 2월에 맞는 명절은 다시 출발의 기회를 선물 받는 시간이라 애써 다짐해 본다. 나로호의 추진단장은 삼세번 도전 끝에 성공하고서 말했다. 성실한 실패를 용인해줘야 우주기술이 발전한다고. 우주개발도 그럴진대 개인의 삶은 오죽할까. ‘성실한 실패’를 감수하는 자세야말로 인간의 깊이를 갖는 길이 아닐까도 싶다. 그래서 이번 설엔 지키지 못한 신년 결심을 반복하기보다 스스로를 편하고 자유롭게 놓아주는 리셋 전략을 선택해 볼까 궁리 중이다. 남들보다 더 잘하려고 고민하지 마라. 지금의 나보다 더 잘하려고 애쓰는 게 중요하다. 윌리엄 포크너는 그렇게 말했다.

고미석 논설위원 mskoh119@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