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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과 내일/최영해]너무 바쁜 대사님들

입력 | 2013-02-12 03:00:00


최영해 논설위원

노무현 정부에서 대통령정책실장을 지낸 김병준 국민대 교수는 1998년 필리핀 마닐라에서 열린 ‘아시아지역 우수 지방자치단체 선정대회’에서 주제발표를 했다. 이 행사에는 김관용 구미시장(현 경북지사)과 조지프 에스트라다 필리핀 대통령 후보, 독일 정부의 나우만재단 사무총장이 초대됐다. 차기 필리핀 대통령에 유력한 대선후보가 참석하는 자리였다. 하지만 행사가 끝날 때까지 대사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 대신 서기관급 외교관이 얼굴을 내밀었다. 김 교수는 “구미시가 세계적인 상을 받는 자리인데 왜 대사가 오지 않느냐”라고 물었다. 이 외교관은 “이런 자리에 어떻게 외교관을 부를 수 있느냐. 교수님은 이런 데 오면 돈을 얼마나 받으시냐”라고 비웃듯 반문했다.

유엔 아시아지역발전위원회 위원 자격으로 참석한 김 교수는 외교관의 ‘황당한’ 질문에 화가 나 “한국에 돌아가면 대사가 이처럼 중요한 행사에 참석하지 않았다는 점을 문제 삼겠다”고 했다. 시간이 없다던 대사는 김 교수의 말이 꺼림칙했던지 전화를 걸어 “다음 날 점심이라도 함께하자”고 했지만 뿌리치고 귀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김 교수는 2004년 노무현 정부에서 대통령정책실장을 하면서 외교부 개혁정책을 쏟아낸다. 김 실장은 한 사람이 임기 3년 대사직을 세 번까지 하던 관행을 없애고 두 번만 하도록 했다. 본부 대기기간도 1년에서 4개월로 줄여 외교부 인사적체에 숨통을 틔웠다. 외교관들의 전유물인 대사 자리 30%도 개방직으로 돌렸다. 김 교수는 “하와이 총영사는 관광전문가가 갈 수 있고, 교민 업무가 많은 로스앤젤레스총영사는 행정자치부 출신이, 남미 국가 대사는 스페인어에 능통한 남미 정치나 경제 전공자들이 갈 수 있도록 물꼬를 터놓은 것”이라고 말했다. 무풍지대(無風地帶) 외교부에 대한 대대적인 수술이었다.

10년이나 지난 얘기지만 김 교수가 경험했던 황당한 관행들은 여전히 외교현장에 남아 있다. 외부 전문가를 수혈하겠다고 만든 개방직도 노른자위 대사나 총영사 자리는 여전히 외교부 출신들이 차지하고 있다. 외교부에선 “외부 전문가 중에는 적임자가 없다”고 둘러대지만 외교부 출신들에게 유리하게 제도를 만들어놨기 때문이다.

3년 남짓 워싱턴특파원을 하면서도 일그러진 외교관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평소 바쁘다던 고위 외교관들이 정치인이나 실력자가 뜨면 공항에서 서로 영접하려고 기를 쓴다. 권력자에게 줄을 대려는 ‘공항 로비’다. 일부 고위 외교관은 퇴임 후를 대비해 현직에 있으면서 학위를 딴다. 현지에서 채용한 영어가 능통한 직원에게 숙제를 떠넘기기도 한다. 요리사와 가정부, 운전사가 딸린 고급 저택을 1년에 몇 차례나 외교무대로 활용하는지 궁금했다. 이게 다 국민 세금 아닌가. 미국에서 근무하다가 아프리카나 중동, 아프가니스탄 등 분쟁지역이나 오지에 발령 나면 좌절하는 외교관도 적지 않다. 밤낮없이 고생하는 많은 외교관까지 폄훼하려는 의도는 없지만 현실은 그렇다.

김성환 외교통상부 장관이 최근 통상 기능을 산업통상자원부로 이관하려는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의 정책이 ‘위헌’이라고 했다. 정부 조직을 개혁하겠다는데 외교관 출신인 장관이 ‘헌법의 골간’ 운운하며 반발하니 박 당선인으로선 황당한 노릇일 게다. 외교통상부에서 통상 기능을 떼 낸다고 했을 때 외교부를 편드는 부처가 왜 하나도 없는지 김 장관은 곱씹어볼 필요가 있다. 대사관에 근무하는 외교관들이 타 부처에서 파견된 주재관 마음도 사지 못하고 자기들만의 담을 쌓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던가. ‘국회에서 듣고 보고 체험한 결정’이라는 박 당선인의 말 속에는 김 교수가 겪은 경험보다 더 생생한 ‘스토리’가 있을지 모를 일이다.

최영해 논설위원 yhchoi65@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