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실패로 끝난 국제사회의 北 비핵화 시도
기상청이 포착한 북핵 지진파 12일 오전 11시 58분경 함경북도 길주군 인근 지역에서 발생한 인공지진과 관련해 기상청 관계자가 지진상황 표출 시스템 자료를 발표하고 있다. 기상청은 이번 인공지진 규모를 2009년 실시된 2차 핵실험 당시 리히터 규모 4.5보다 강한 4.9로 추산했다. 장승윤 기자 tomato99@donga.com
북한은 처음부터 한국과 미국을 포함한 국제사회의 평화적 북핵 해결 노력을 비웃어 왔다. 1992년 남북이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을 발표한 다음 해인 1993년 제1차 북한 핵 위기가 발발했다. 그 후 20년 동안 국제사회는 북한의 비핵화를 위해 북한 정권을 압박하기도 했고 대화도 나눴지만 북한은 2006년 1차, 2009년 2차, 12일 3차 핵실험으로 대답했다.
○ 원칙 잃고 흔들린 국제사회의 대응
북한은 2005년 9·19공동성명이나 2007년의 2·13합의에 응하면서도 핵 동결, 핵 불능화, 핵 폐기 등으로 단계를 쪼개 놓은 이행의 검증은 요리조리 빠져나갔다. 국제사회가 이를 지적하면 기다렸다는 듯이 반발하며 협상을 원점으로 되돌렸다. 2008년 8월에는 미국이 북한을 테러지원국 명단에서 삭제하지 않았다는 이유를 내세워 영변 핵시설을 복구하고 핵시설 봉인 및 감시 장비를 제거했다. 이처럼 북한 핵 개발 저지를 위해 하나씩 쌓아 왔던 ‘공든 탑’들은 북한의 도발로 너무 쉽게 무너지곤 했다.
이런 북한과 달리 국제사회의 대응은 일관되지 못했다. 미국 빌 클린턴 행정부와 조지 W 부시 행정부는 ‘핵 보유 국가가 되겠다’라는 북한의 명확한 목표를 간과한 채 실효성이 없는 대화와 압박을 반복했다. 막상 북한이 미래 지향적으로 대화에 나설 조짐을 보였을 때에는 ‘악의 축(axis of evils)’을 거론하고 고강도의 금융제재를 단행하며 북한의 불신을 키웠다.
이들의 실패를 교훈 삼아 ‘같은 말을 두 번 사지 않겠다’라며 ‘전략적 인내(strategic patience)’ 정책을 편 버락 오바마 행정부도 마찬가지였다. 북한의 장거리로켓 발사 의도를 눈치채지 못하고 지난해 섣불리 ‘2·29 북-미 합의’를 해 준 것이나 북한의 로켓 발사에 강경 대응을 천명하면서도 물밑에서는 부랴부랴 평양행 비행기를 띄워 협상을 시도한 것 등이 대표적 사례다.
○ 한국 정부, 국제사회와 엇박자
그동안의 북핵 협상에 참여했던 정부 당국자들은 “포용, 강경책을 포함해 할 수 있는 것을 다 해봤지만 북한이 바뀌지 않는 상황에서 대응에 한계가 있었다”라고 반박했다. 더구나 일당독재 체제인 북한은 상식적이고 일반적인 협상의 룰이 통하지 않는 상대인 반면에 한미 양국을 비롯한 국제사회는 자국의 여론과 선거, 의회의 동의 등 고려해야 할 변수가 너무 많다는 점도 협상 진행을 어렵게 하는 요인이라고 이들은 설명했다.
국제사회가 대북 제재와 외교적 고립 정책을 강화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중국의 비협조로 제재 효과를 보지 못한 것도 문제다. 북한과 혈맹관계인 중국은 대규모 대북 지원을 끊지 않았고 북한의 무기 부품 반입 같은 불법 행위도 사실상 묵인해 북한의 숨통을 틔워 줬다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이정은 기자·워싱턴=신석호 특파원 lighte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