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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렌즈는 늘 이땅의 낮은 곳을 향했다

입력 | 2013-02-13 03:00:00

한국 다큐 사진 1세대 작가 최민식씨 별세




50년 넘게 서민들의 삶을 앵글에 담았던 고 최민식 씨. 동아일보DB

일하러 나간 엄마를 대신해 하루 종일 동생을 업고 있는 아이, 리어카에 짐을 잔뜩 싣고 언덕을 올라가는 사내, 눈물범벅이 돼 엄마를 기다리는 꼬마….

한국 다큐멘터리 사진 1세대 작가인 최민식 씨의 작품에는 가난한 시절 한국인의 자화상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서민들의 굴곡진 삶을 앵글에 담아온 그가 12일 오전 8시 40분 자택에서 노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85세.

고인의 딸은 “지난해 11월 아버지가 건강이 안 좋아져 병원에 3개월 입원했다가 열흘 전 퇴원했다”며 “병원에서 ‘연세가 많아 이전 같은 건강을 찾기는 힘들 것 같다’는 얘기를 들었지만 이렇게 빨리 악화될 줄은 몰랐다. 오랜 과로가 누적된 것 같다”고 전했다.

고인의 꿈은 원래 화가였다. 1928년 3월 6일 황해도 연백에서 태어난 그는 어려운 가정 형편 때문에 자동차 기능공으로 일하다 상경해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미술학원을 다녔다. 1955년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도쿄 중앙미술학원에서 미술을 공부하던 시인은 헌책방에서 우연히 룩셈부르크 출신의 사진작가 에드워드 스타이컨의 사진집 ‘인간가족’을 보고 큰 감흥을 얻은 뒤 사진으로 방향을 바꿨다.

할머니의 등에 업혀 국수를 받아먹던 아이는 어떻게 자랐을까. 자갈치시장에서 드잡이를 하던 아낙네들은 그때를 기억할까. 12일 별세한 사진작가 최민식 씨의 작품에는 가난한 시절 힘들었던 우리네 삶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할머니와 아이 사진은 1965년 부산 촬영, 아낙네들은 1989년 부산 자갈치시장 촬영. 동아일보DB

고인은 1957년 사진에 입문한 이후 56년간 사진가로 살아오면서 줄곧 ‘인간’이라는 주제에 매달렸다. 미국 독일 프랑스를 포함한 20여 개국에서 사진전을 열고 ‘한국의 얼굴’을 알렸다. 1967년 영국 ‘사진 연감’에 작품 6점이 실리며 ‘카메라의 렘브란트’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고인은 1968년 동아일보사에서 ‘인간(HUMAN)’이라는 제목의 사진집 1권을 낸 이후 총 14권을 발표했다. 지난달에는 사진집 14권에 그의 작품세계를 잘 보여주는 사진과 에세이를 추가해 사진 인생 50년을 결산하는 사진집도 냈다. 부산대, 경성대, 인제대 강단에 올라 후학을 길렀으며 옥관문화훈장, 부산문화대상, 국민포장, 동강사진상 등을 받았다. 고인은 2008년 자신의 사진작품 원판 10만여 장을 비롯해 13만여 점의 자료를 국가기록원에 기증해 자료가 민간 기증 국가기록물 제1호에 지정되기도 했다.

그는 철저한 현장주의자였다. 부산 남구 대연1동에 살았던 고인은 건강이 악화되기 전인 지난해 초만 해도 자주 찾던 촬영 장소인 자갈치시장까지 3시간을 걸어갔다. 차를 타고 가면 길에서 만나는 풍경과 사람을 제대로 볼 수 없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내가 자갈치시장이라는 현장 속에서 찾으려 한 것은 서민상이었다. 인물사진에 남다른 열정을 가진 나에게는 자갈치시장이야말로 서민이 몸담고 있는 사회적 공간이었다.’(자서전 ‘진실을 담는 시선’ 중에서)

생전 일주일에 두세 번은 자갈치시장을 찾아 셔터를 눌렀던 고인은 부산 부전역 근처 부전시장도 즐겨 찾았고, 때로는 물건을 팔러 오는 상인들과 함께 새벽 기차를 타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인도나 네팔 등을 찾아 현지 서민들의 궁핍한 일상을 사진으로 전하기도 했다.

후배 사진작가인 이수길 씨(52)는 4, 5년 전 고인과 처음 만났을 때의 일화를 들려줬다. 고인의 사진전시회에 갔다가 인사를 했더니 고인은 “반갑습니다”라는 인사말 대신 “사진은 사상(思想)입니다”라는 말을 건네며 악수를 청했다고 한다. 이 씨는 “고인은 초지일관, 50여 년 동안 오로지 휴머니즘의 외길을 가셨다. 후배들에게는 리얼리즘 사진을 강조하셨고, 항상 열정적으로 작업에 임하셔서 후배들에게 귀감이 됐다”고 전했다.

소득 수준이 높아지면 사람의 얼굴도 변하는 것일까. 고인은 지난해 3월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1960, 70년대에는 좋은 표정이 많았어요. 그때 찍은 사진들을 보면 가슴에 참 와 닿죠. 그런데 정작 제가 먹고사는 일이 바빠 생각만큼 많이 찍지는 못했어요. 지금은 시간은 많은데 그런 표정들을 발견하기 어렵습니다. 왜 그때 더 많이 찍지 못했나 후회스럽죠.”

고인은 2009년 펴낸 산문집 ‘낮은 데로 임한 사진’(눈빛)에서 유독 낮은 곳에 앵글을 놓은 이유를 담담히 밝혔다. ‘나는 계속 걸었고, 언제나 카메라와 함께 있었다. 나는 카메라로 사람들을 찍었다. 사람들은 가난했고, 나는 그들을 찍었다. 나는 없는 길을 간 것도 아니고, 이 땅에 없는 사람들을 찍은 것도 아니다.’

유족으로는 부인 박정남 씨와 3남 1녀가 있다. 빈소는 부산 남구 용호동 부산성모병원. 발인은 15일 오전 5시 30분. 051-933-7129

황인찬 기자 hic@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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