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희귀본 시집 1000여권 소장 배우식 시인의 ‘시 사랑’
초판본 시집 1000여 권을 소장하고 있는 배우식 시인.
박물관 유리 너머로나 볼 수 있을 법한 귀한 물건을 손으로 만지니 묘한 흥분이 느껴졌다. 책 주인이 웃으며 말을 건넸다. “이 책이 얼마 전 (경매에서) 거래됐는데 아마 3000만 원이었지요.” 시집을 쥔 손이 살짝 떨렸다.
윤동주의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초판본(1948년 1월·정음사)에 실려 있는 ‘서시’. 시의 본문 아래 시를 쓴 날짜인 ‘1941. 11. 20’이 적혀있다. 첫 행에서 ‘우르러’라고 표현한 옛말은 요즘 ‘우러러’로 바꿔 읽힌다. 용인=황인찬 기자 hic@donga.com
어떻게 개인이 이런 희귀본을 모을 생각을 했을까. “소장가로 비치는 게 부담스럽다”는 시인은 30여 년 전 얘기를 들려줬다. 그는 문청(文靑)이었지만 생업을 위해 대그룹 건설회사에 다녔다. 유럽, 아프리카 현장에서 일한 그는 현지 감독관에게 선물할 예술품을 구하기 위해 귀국하면 골동품 가게를 찾았다. 그러다 1980년대 중반 청계천 가게에서 ‘정지용 시집’ 초판본을 발견했다. 당시 회사원 월급의 서너 배, 현재로 치면 약 1000만 원 돈이었지만 잊었던 ‘시에 대한 열망’이 떠올라 과감히 질렀다.
배우식 시인이 소장하고 있는 희귀 초판본 시집들. 왼쪽부터 이병기 선생의 ‘가람시조집’(1939년), 이육사의 ‘육사시집’(1946년), 박목월 조지훈 박두진의 ‘청록집’(1946년), 정지용의 ‘정지용 시집’(1935년), 윤동주의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1948년). 용인=황인찬 기자 hic@donga.com
뒤늦게 뇌종양 판정을 받은 그는 2001년 수술을 통해 건강을 찾았다. 이후 초판본을 구하려고 전국의 고서 경매장과 고서점을 돌았다. 1년에 1억 원 넘게 쓴 적도 있다. 다행히 경제적 여유가 있었다. 낡은 책을 사들이는 남편을 보고 아내는 “돈도 있는데 왜 헌책을 사느냐”고 물은 적도 있다.
한번은 백석의 ‘사슴’ 초판본(1936년 1월 20일·자가출판본)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1억 원을 들고 소유자를 찾아갔지만 “10억 원”으로 높여 부르는 바람에 접었다. 몇 년 전 일이다. 그는 “돈 얘기는 더 하지 말자”며 이쯤에서 입을 다물었다.
용인=황인찬 기자 hic@donga.com
▼ 희귀본 거래 대부분 인터넷 경매… 문학관이 ‘큰손’ ▼
고서점과 수집가들 사이의 희귀 시집 거래는 1970∼90년대 호황을 이뤘다. 2000년대 들어 귀한 시집 구하기는 쉽지 않아졌다. 문인을 기리는 문학관이 전국 각지에 들어서고 거래의 관문도 오프라인 서점에서 온라인 경매로 이동하면서 눈에 보이는 거래가 크게 줄었다.
여전히 거래가 이뤄지는 곳은 있다. 인터넷 경매나 전문 경매사를 통하면 된다. 코베이나 한옥션 같은 인터넷 경매 사이트에 종종 시집이 올라온다. 서울 인사동 화봉문고의 여승구 대표는 “박물관, 기념관 같은 국공립 기관이 시장에 대거 뛰어든 데다 소중한 자료는 개인수집가가 잘 내놓지 않아 거래가 많지 않다”고 했다.
내용이 같으면 표지가 멀쩡한 것이 몇십 배 비싸다. 장서는 한정돼 있는데 좋은 물건이 나오는 경우는 적어 최근 발을 들인 수집가들은 발만 동동 구르는 경우가 많다. 수집가들의 친목 모임에서 경매 정보가 공유되고 일대일 직거래가 이뤄지기도 한다.
임희윤 기자 im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