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상회담 2회, 장관급회담 21회… ‘核카드’ 꺼내지도 못했다
철조망 뒤의 北 황금평 경제특구 북한 핵실험으로 북-중 관계에 어떤 변화가 생길지 주목되는 가운데 중국 랴오닝 성에서 바라본 북한 황금평 경제특구의 모습. 소달구지를 끄는 한 북한 주민 뒤쪽으로 북한과 중국의 공동관리위원회 사무실이 입주할 건물 등이 보인다. 랴오닝=변영욱 기자 cut@donga.com
북한의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로 1차 북핵 위기가 터진 1993년 5월. 당시 김영삼 대통령을 예방한 윌리엄 페리 미국 국방부 부장관은 이렇게 말했다. 북핵 문제의 핵심 당사국이 남한과 북한임을 분명히 한 것이다.
그 후 20년간 한국은 북한과 수많은 대화와 협상을 했다. 그러나 20년 전이나, 3차 핵실험이 강행된 지금이나 북한 핵의 최대 피해자인 한국이 과연 북핵 해결의 ‘당사자’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북한은 애초부터 핵문제를 북-미 간 협상 주제로 규정했다. 한국을 대미 협상을 진척시키는 수단으로만 활용했다. 북한이 그토록 외쳐온 ‘우리 민족끼리’ 구호는 북핵 대화와 협상에서는 공허한 말장난에 불과했다.
2000년 이후 남북 간에는 정상회담 2회, 3번의 대통령 특사 방북, 21차례의 장관급회담이 있었다. 그러나 핵문제는 제대로 다뤄진 적이 거의 없다.
김대중 정부는 임기 막바지인 2003년 1월 임동원 대통령 특사에게 핵문제 해결 임무를 맡겨 평양에 보냈으나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만나주지도 않았다. 전직 고위 당국자는 “남북 간 회담 여건이 조성될 때마다 핵문제를 제기했지만 진지한 논의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남한이 일방적으로 핵문제를 거론하다가 끝나버리곤 했다”고 토로했다.
2000년 7월∼2007년 5월 21차례나 진행된 남북 장관급회담에서 한국 대표가 ‘핵문제 해결 없이는 남북 관계가 진전될 수 없다’는 태도를 보이면 북한 대표는 늘 딴청을 피웠다. 남한은 북핵 문제의 대화 상대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 때문에 김대중, 노무현 정부가 기대한 ‘남북 관계 개선을 통한 북핵 문제 해결’이란 선순환 구도는 굴러갈 수 없었다.
북핵 문제에서의 한국 소외 현상은 6자회담 같은 다자대화에서도 반복됐다는 지적이 많다. 북한은 6자회담에서도 한국을 미국을 움직이기 위한 지렛대로만 활용했다는 비판이 나온다. 북측 6자회담 수석대표인 김계관 외무성 부상이 한국 수석대표에게 “이라크가 붕괴된 것은 핵이 없었기 때문이고 우리가 핵 폐기를 하려면 조선반도에 평화체제가 정착돼야 한다. 남한이 미국의 적대시 정책이 바뀌도록 설득해 달라”고 요구해 온 것도 같은 맥락이다.
한국 정부 내에서는 “북-미 대화가 북핵 문제의 근본적 해결을 위한 징검다리 역할을 해준다면 굳이 반대할 이유가 없다. 북-미 대화의 성과를 6자회담의 틀 안에 잘 녹이는 게 중요하다”는 의견이 적지 않다. 그러나 문제는 북한이 미국과의 합의나 약속도 잘 지키지 않는다는 것이다. 2005년 ‘9·19 공동성명’은 미국 재무부의 대북 금융제재를 이유로, 2007년 ‘10·3 합의’는 이행검증서 채택 문제로 반발하며 약속을 파기했다.
외교안보 부처의 한 당국자는 “북한이 3차 핵실험까지 한 상황에서 협상을 통한 북핵 외교는 실패한 것 같다는 회의감이 밀려온다”고 말했다. 엄상윤 세종연구소 연구위원은 “전쟁을 하면서도 대화는 이어져야 한다고 하지만 북한의 이런 태도가 바뀌지 않는 한, 의미 있는 대화 국면이 재개되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 믿을 수 없는 북한과 어떻게 대화할까
북한은 협상장에 나와 앉는 것조차도 하나의 협상카드로 써왔다. 김영남 북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은 2009년 7월 “미국과 그 동맹국이 조선의 주권을 존중하지 않아 6자회담은 영원히 끝났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듬해 8월 박의춘 북한 외무상은 “참가국이 평등한 대우를 받는다면 6자회담에 복귀할 용의가 있다”고 밝혔다. 회담장 이탈과 복귀를 협상카드로 자유자재로 활용하는 것이다. 이에 앞서 2005년 2월에도 북한 외무성은 핵무기 보유를 선언하면서 “6자회담을 무기한 중단한다”고 선언했다가 5개월 만에 슬그머니 회담장으로 돌아왔다.
최근에는 비공개 접촉 사실을 폭로해 상대방을 곤경에 빠뜨리는 전술도 쓴다. 2011년 6월 북한 국방위원회는 남측 접촉 인사의 실명까지 거론하며 “남한이 정상회담을 애걸하며 돈봉투까지 건넸다”는 일방적인 허위 주장을 폈다.
이수석 국가안보전략연구소 연구위원은 “북한은 항상 도발 뒤 유화 국면을 전개하는 ‘치고 빠지기 전술’을 보여 왔다. 박근혜 정부가 이런 북한을 상대하려면 로드맵과 정책의 우선순위 등 협상전략을 확실히 짜둬야 한다”고 말했다. 박종철 통일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한국이 남북 간 협상에서 주도권을 가지려면 북핵 문제 해결과 남북 관계 개선을 반드시 병행 추진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조숭호 기자 shch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