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트렌드 생활정보 International edition 매체

[버킷리스트의 꿈을 이룬 사람들]성악가 김동규와 할리데이비슨

입력 | 2013-02-16 03:00:00

2기통 엔진의 거친 변주, 어느새 심장이 두근거린다




김동규 교수가 자신의 애마인 할리데이비슨 로드킹 스탠더드를 타고 서울 반포 부근을 달리고 있다. 그는 자신이 좋아하는 흰색 바탕에 음표를 상징한 디자인으로 모터사이클을 꾸몄다. 신원건 기자 laputa@donga.com

프롤로그

가수 고 김광석은 숨지기 몇 년 전 한 콘서트 장에서 소원을 말했다.

“가까운 시일이죠. 7년 뒤 마흔 살 되면 오토바이 하나 사고 싶어요. 멋있는 걸로…. 돈도 모아놨어요. 얘길 했더니 주변에서 상당히 걱정하시데요. 다리가 닿겠니. 세계일주 하고 싶어요. 괜찮겠지요. 나이 40에 그러면 참….”

그의 버킷리스트는 미완으로 끝났지만 남자들의 꿈이 무엇인지 보여줬다. 그가 꿈꿨던 기종은 할리데이비슨(할리)이었다.

지난달 중순, 콧수염으로 유명한 바리톤 김동규 강남대 석좌교수를 찾았다.

서울 강남구 논현동 그의 빌라. 버킷리스트와 할리의 관계에 대해 소감을 부탁했다. 그는 ‘당신, 제대로 찾아왔다’는 눈빛을 던졌다. 곧이어 할리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놓기 시작했다.

“아주 자연스러운 거죠. 할리를 버킷리스트 안에 넣는 것은.”

남자라면 한번 타봐야 한다고 했다. 버킷리스트라기보다 노후대책의 하나로 꼽았다.

“늙어서 할 일이 없으면 심심하잖아요. 인생의 쓴맛 단맛 다 본 사람들이 웬만한 건 재미없을 걸요. 그때 할리를 타면….” 할리의 무엇이 남자들을 끌어당기는 걸까.



2개의 심장이 내뿜는 야성

‘두둥 두두둥 두두두두둥 둥둥….’ 이렇게 써보긴 하지만 글로는 표현할 수 없는 그 소리. 이 소리가 할리의 마력이다. 정확히 말하면 정지했을 때 내는 배기음이다. 심장의 고동 소리처럼 들린다고 하지만 심장이 이렇게 엇박자로 뛸 순 없다.

그렇다. 심장이 하나가 아니라 두 개다. 두 개의 심장이 각각 몸부림을 치며 토해내는 변주는 사나이 가슴에 뜨겁고 뭉클한 열정을 쏟아 붓는다.

할리데이비슨은 공랭식 2기통, 즉 두 개의 엔진을 가졌다. 4기통 6기통으로 늘어날수록 엔진과 배기 소음은 줄어든다. BMW나 혼다처럼 첨단기술을 적용한 모터사이클의 엔진음은 조용하고 정숙하다. 편안하다. 하지만 심심하다.

“제가 음악을 하니까 소리에 더욱 민감해요. 투박하고 거친 할리의 심장 2개가 쏟아내는 음은 다른 모터사이클이 따라올 수 없어요. 배기음을 악보로도 쓸 수 있어요.”

투박한 2기통의 효과는 또 있다. 거친 진동이다. 모터사이클에 올라타면 온몸이 부르르 떨린다. 엔진 공회전을 좀 세게 시키면 모터사이클이 분해될 것처럼 느껴질 정도다. 이게 사나이의 몸 세포를 하나하나 깨운다. 내 몸이 살아있구나. 내 몸은 이 할리의 흔들림을 원하는구나.

“다른 모터사이클에 비해 기계적으론 한참 뒤떨어진 거죠. 하지만 할리의 소리는 사나이의 열정을 깨우고, 할리의 진동은 사나이의 몸을 깨우죠.”

할리도 조금씩 진화한다. 하지만 할리 팬 중에는 이를 거부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김 교수가 타는 기종은 로드킹 2006년식. 그러나 엔진의 인젝션은 2005년식이다. 그가 일부러 바꿨다. 업그레이드된 새 인젝션이 마음에 안 들었던 것이다. 그는 국내에 단 하나 남은 구형 인젝션을 구했다.

“소리가 달라요. 원조의 맛, 아날로그의 느낌을 갖고 싶었어요.”



속도가 아닌 바람을 느낀다

그는 처음부터 할리 사랑으로 모터사이클 인생을 시작한 것이 아니었다. 20대엔 스쿠터나 125cc 오토바이를 타고 다녔다. 속도도 내고 거칠게 몰던 시절이었다. 해외로 유학을 가면서 자연스레 오토바이와 멀어졌다.

그가 모터사이클에 본격 뛰어든 건 2005년. 공연으로 바쁜 연말, 무심코 1시간 반 간격으로 세종문화회관, 예술의전당, 코엑스에서 저녁 공연을 잡은 게 계기가 됐다.

연말에 꽉꽉 막히는 교통체증을 감안하면 승용차로는 도저히 제시간에 도착할 수 없었다. 그 때 번뜩 떠오른 것이 모터사이클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시내 주행에 최고인 스쿠터였다. “다른 사람들이 모두 연주 리허설 할 때 전 오토바이 리허설 했어요.”

공연 하루 전, 그는 세종문화회관에서 오후 7시 공연을 가졌다고 가정하고 연미복에 외투만 걸친 채 모터사이클을 타고 예술의전당으로 내달렸다.

“몇 분 걸리는지 아세요? 18분 걸려요.”

여유 있게 예술의전당에 도착. 그는 여기서도 8시 공연이 끝날 시간을 계산한 뒤 그 시간에 맞춰 코엑스로 달렸다. 10분밖에 안 걸렸다. 다음 날 연습대로 똑같이 움직여 무사히 실제 공연을 마칠 수 있었다.

오랜만에 탄 모터사이클은 그에게 갈증을 불렀다. 이튿날 서울 충무로 모터사이클 상가를 찾았다. 그날 그의 눈을 사로잡은 건, 할리가 아니라 일본 혼다의 ‘발키리룬’이란 빅바이크였다. 특히 코발트블루와 크롬메탈의 색깔 조화는 5분여 동안 움직일 수 없게 만들었다. 그는 즉석에서 발키리룬을 구매했다. 6기통 1800cc. 살짝 스로틀을 당겨도 순식간에 시속 100km에 달하는 괴물 같은 바이크였다. 그러나 채 1년도 타지 못했다.

“강남 개포동이었어요. 당시 시속 100km가 넘었는데 언덕을 넘자마자 바로 차가 서있는 거예요. 딴 생각이 안 나더라고요. 저는 발키리룬을 던지고 굴렀죠. 발키리룬은 앞 차를 들이받았는데 두 차 모두 폐차했어요.”

사고 후 깨달았다. 속도가 아니었다. 그가 모터사이클에서 바란 것은. 자유로움이 필요했다. 속도가 아닌 바람을 느낄 수 있어야 했다. 할리였다.

“할리는 60∼80km로 달리는 게 딱 좋아요. 그 이상이면 소리가 나빠지고 진동도 심해져요. 속도가 빠르면 도로와 차만 보고 달릴 수밖에 없어요. 할리는 풍경을 보며 달릴 수 있죠.”

김 교수는 할리는 40세가 넘어 타는 모터사이클이라고 했다. 속도 욕심 없이 안정적으로, 그러면서도 짜릿한 스릴을 느끼며 탈 수 있는 연령대가 그때라는 것이다.



멋과 정성으로 탄다

그가 선택한 할리는 중간급에 속하는 로드킹 스탠더드. 1600cc에 400kg에 육박한다. 무게나 몸집을 보면 할리는 교통수단이 아니다. 김 교수도 실용적 교통수단을 위해선 50cc 스쿠터를 탄다. 그는 집에서 반포까지 3분 걸린다며 스쿠터를 예찬했다.

교통수단이 아니기 때문에 할리는 멋으로 탄다. 따라서 공장에서 출고된 대로 타지 않는다. 남들과 똑같기 때문이다. 할리 오너라면 자기의 구미에 맞게 ‘커스텀’하는 것이 기본이다. 할리는 ‘정성’으로 탄다.

김 교수도 도색을 다시 했다. 평소 하얀 옷과 구두를 즐기는 그의 취향대로 하얀색으로 도색하고 음표를 형상화한 이미지를 그려 넣었다. “바람을 달리는 음표라고 할까요. 대전까지 내려가서 디자인을 맡겨 도색했죠.”

그의 로드킹도 출고 8년이 넘었지만 새 것과 거의 차이가 없다. 시간 날 때마다 닦고 조이고 기름 친다. “할리 오너들은 대부분 관리를 잘해요. 할리는 어른들의 꿈이자 장난감이랄까요. 그래서 신형이 2000만 원인데 구형이 3000만 원인 경우도 있어요. 저도 다시 산다면 새 차가 아니라 누가 잘 관리한 중고차를 사고 싶어요. 할리가 일부러 약간 모자란 제품을 내놓는 거 같기도 해요.”

할리 오너들은 차에만 신경 쓰는 게 아니다. 라이딩 복장이나 액세서리에도 정성을 기울인다. 할리는 멋져 보이기 위해 탄다는 말이 과히 틀리지 않다. 자신을 드러내기 좋아하는 사람이 즐겨 타는 머신이다.



세 가지 과제

할리를 타려면 세 가지 과제를 넘어야 한다. 우선 2종 소형면허를 따야 한다. 125cc 이상 모터사이클을 몰려면 필수. 여유 자금이 있어야 한다. 제일 저렴한 스포스터 883도 1500만 원이 넘는다.

마지막, 부인의 반대를 넘어야 한다. 가장 어려운 장애다.

“보통 부인들이 ‘모터사이클 타려면 나 죽고 타든가’라고 말한다고 해요. 모터사이클은 위험하다는 생각 때문에 당연한 반응인데요. 그때 부인을 한 번 뒷좌석에 태우고 투어를 해보세요. 모터사이클이 주는 스릴과 짜릿함, 자유로움을 맛보게 해주는 거죠. 그리고 천천히 달리기 때문에 위험하지 않다는 것도 보여주는 거예요. 그럼 열에 아홉은 찬성할 겁니다.”

사진을 찍기 위해 로드킹이 있는 지하 주차장에 내려갔다가 김 교수의 어머니 박성련 씨(80)를 만났다. 어머니도 성악가로 국내에서 오페라 ‘일트로바토레’의 여 주인공을 처음으로 공연한 인물. 아까 김 교수의 말이 생각나 여쭸다.

“할리 뒷좌석에 타보셨어요.”

“타봤지. 무서워서 혼났어.”

부인과 어머니는 다른가보다.

서정보 기자 suhchoi@donga.com

▼ 110세 미국산 명품… 40, 50대 남성 여유로운 삶의 상징▼

할리데이비슨은 1903년 미국 위스콘신 주 밀워키의 한 공장에서 처음 출생했다. 올해 나이가 110세. 현존하는 모터사이클 중 가장 연장자다.

할리데이비슨의 이름은 모터사이클 제작자인 윌리엄 할리와 아서 데이비슨의 성을 따서 만들어졌다. 제1, 2차 세계대전에 군용 모터사이클로 납품됐다. 이때 미국을 넘어 전 세계로 유명세를 떨칠 기회를 얻었다.

할리는 미국의 자존심으로 여겨지는 브랜드다. 1981년 일본 모터사이클의 공세로 회사가 파산위기에 처한 적도 있다. 로널드 레이건 당시 미국 대통령이 일본산 모터사이클에 엄청난 관세를 부과해 할리 구제에 나서기도 했다.

석양을 뒤로 한 채 황량한 사막 한복판 도로 위를 유유히 질주하는 할리는 미국 서부영화의 현대판이다. 비주얼은 근육질 남성을 연상시킨다. 할리의 강한 진동과 소리는 말을 타고 달리는 것과 흡사한 느낌을 준다. 할리를 구입한 외국 마니아들의 꿈은 ‘할리를 타고 미국 대륙을 횡단하는 것’. 브랜드가 가진 ‘미국성’이 얼마나 강한지 짐작할 수 있다.

한국에 할리가 처음 들어온 것은 6·25전쟁 때다. 당시 미군은 할리를 군용 모터사이클로 쓰고 있었다. 이후 역대 대통령 취임식과 VIP 경호 때 경찰청과 헌병대가 많이 사용했다.

할리코리아가 설립된 것은 1999년. 14년간 매년 1000여 대의 모터사이클을 팔았다. 한국 내에서도 두터운 마니아층을 형성하고 있다. 651cc급 이상 대형 모터사이클 분야에서는 할리가 시장점유율 1위다. 삶의 여유를 즐기고 싶은 40, 50대 중장년 남성이 주요 타깃.

할리는 충성도 높은 고객을 겨냥한 동호회마케팅의 성공사례로 자주 언급된다. 전 세계적으로 운영되고 있는 할리 오너들의 모임인 호그(H.O.G.·Harley Owners Group)의 한국 회원 수만도 1400여 명이다.

호그에 가입한 한국 라이더들의 평균 연령은 43.2세다. 차 한 대 가격과 맞먹어 20, 30대 소비자가 접근하기도 어렵다.

현재 26종의 모델이 국내 판매되고 있다. 아이언 883(1590만 원)과 스트리트 글라이드(2950만 원)가 많이 팔린다.

정효진 기자 wiseweb@donga.com

관련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