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장국가 북한/권헌익 정병호 지음/340쪽·2만 원·창비
북한의 대표적인 집단 예술 공연 ‘아리랑’. 백두산에 떠오르는 태양을 배경으로 수많은 참가자가 무용을 하고 있다. ‘극장국가’ 북한은 예술적 과시를 통해 최고지도자의 카리스마 권력을 유지해왔다. 이런 체제가 과연 언제까지 지속될 수 있을까. 창비 제공
인류학의 기본인 현장연구가 불가능한 북한을 저자들이 연구 대상으로 삼은 계기는 2000년대 초로 거슬러 올라간다. 정 교수는 인도주의 단체의 일원으로 평양을 방문했다가 1990년대 중반에 건립된 화려한 기념물들을 보고 놀랐다.
저자들은 인류학자 클리퍼드 기어츠가 창안한 ‘극장국가’라는 개념을 빌려 북한의 정치를 분석한다. 기어츠는 19세기 인도네시아 발리에서 왕이 강제적 수단으로 인민을 통치하기보다 화려한 의례와 공연을 통해 왕이 세상의 중심임을 과시함으로써 왕의 정치적 권위를 유지했다고 주장했다.
아리랑공연과 혁명가극으로 대표되는 집단 예술 공연, 선동 영화, 대규모 건축물 등에서 보듯 북한은 뚜렷이 극장국가의 면모를 갖춰왔다. 김일성이 죽은 지 20년이 다 되어가고 그 사이 최고지도자는 3대에 걸쳐 세습됐지만 북한은 여전히 살아 있다. 독일의 사회학자 막스 베버가 말한 ‘카리스마 권력’의 필연적 종말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셈이다. 베버는 지도자의 카리스마적 권위에 기반을 둔 카리스마 권력이 위기 때 등장했다가 서서히 사라져 ‘전통적 권력’이나 ‘합리적-법적 권력’으로 대체된다고 주장했다. 이는 옛 사회주의권의 몰락으로 증명됐지만 북한만은 예외다.
저자들은 북한이 카리스마 권력의 비영속성을 넘어 3대째 권력 세습까지 이뤄낸 비결을 극장국가적 기제에서 찾는다. 여기서 김일성과 김정일의 치밀한 전략이 드러난다. 영화광으로 알려진 김정일의 예술 편력은 개인적 취향이라기보다 사회주의체제의 지도자로서 공적인 임무 수행으로 봐야 한다는 견해도 있다. 극장국가로서의 북한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는 금수산태양궁전에 방부 처리된 채 영구 보존되어 있는 김일성과 김정일의 시신이다. 이들이 썩지 않는 것은 곧 북한 정치체제의 영생을 의미한다.
김일성이 사망한 뒤 빈곤 속에서도 그를 추모하고 영생을 찬양하는 대규모 건설사업과 예술작품 제작이 이어졌다. 이는 2002년 김일성의 90회 생일을 기념해 시작된 아리랑공연에서 절정을 이룬다. 이 공연에서는 아동 학생 군인 등 10만 명이 동원돼 1시간 반 동안 음악 무용 체조 카드섹션으로 북한의 정치적 역사와 위대함을 전달한다.
기어츠는 현대국가가 단지 극장국가로만 존재할 수는 없다고 보았다. 주민들은 굶주리고 국제사회에선 고립된 북한에 현재 남은 것은 극장국가라는 껍데기뿐인지도 모른다. 이제는 북한 주민도 한국 드라마를 보는 시대가 아닌가. 북한이 낡은 극장국가적 기제를 답습하기엔 이미 세상은 빠르게 변했다. 카리스마 권력이 지속되기 어려워진 상황에서 핵실험은 벼랑 끝에서 벌인 값비싼 쇼가 아닐까.
저자들도 이 점을 똑똑히 지적한다. 북한의 미래를 위해선 극장국가의 한계를 받아들이고 이를 끝내야 한다고 강조한다. 북한이 국제사회의 지원을 받아들이고, 선군정치로 야기된 잘못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말이다. 구체적으로는 핵무장 계획을 중지하고 인민의 생존보다 군대의 보전을 우선하는 비도덕적 경제정책을 중단해야 한다는 게 저자들의 조언이다.
신성미 기자 savori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