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게 TV야”… 황당한 혁신, 세계가 깜짝
지난해 초 삼성전자 수원사업장 회의실. 이 회사 TV 개발 연구진은 술렁거리는 분위기 속에서 서로 황당하다는 눈빛을 주고받았다. 이제까지 온갖 신제품을 다 만들어냈던 그들에게도 이 신형 TV 디자인은 당황스럽기 그지없었다. 거대한 메탈 프레임 속에 TV 디스플레이가 걸려 있는 모습은 멀리서 보면 마치 TV가 공중에 떠 있는 듯했다.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이듬해 1월 열리는 세계 최대 가전전시회 ‘CES 2013’까지는 완성품을 내놔야 한다는 주문에 회의실에선 한 번 더 탄식이 쏟아졌다. 삼성전자가 지난달 출시한 초대형 85인치 초고화질(UHD) TV ‘85S9’의 첫 내부 데뷔 자리였다.
국내서 77대만 한정 판매 삼성전자 연구원들이 수원사업장 내 전시실에 설치된 초고화질(UHD) TV ‘85S9’ 앞에서 엄지손가락을 들어 보이고 있다. UHD TV 세계시장의 규모는 올해 50만 대에서 2016년 700만 대로 커질 것으로 예상된다. 삼성전자 제공
사실 이제 TV는 누구에게나 익숙한 전자제품이다. 지난해 한 해 동안 세계적으로 2억3000만 대가 넘게 팔려 나갔고 최근 통계에 따르면 국내 가구당 평균 TV 보유 대수도 1.57대에 이른다. 워낙 흔하고 어디서나 쉽게 접할 수 있다 보니 혁신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기 쉽다. 하지만 액정표시장치(LCD)와 플라스마디스플레이패널(PDP) TV에서 3차원(3D) TV, 스마트 TV, 유기발광다이오드(OLED) TV까지 TV 업계는 치열한 고민의 흔적이 녹아 있는 신개념 결과물들을 매년 내놓고 있다.
세계 TV시장 1위인 삼성전자가 올해 주력하는 제품은 UHD TV다. 전자업계는 UHD TV 시장 규모가 급성장해 올해 50만 대에서 2016년에는 700만 대까지 커질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삼성전자가 핵심 인력들을 총동원해 세계 최대 UHD TV 개발에 매달린 이유다. 지난달 방문한 수원사업장은 2013년 삼성전자의 ‘새 심장’이 뛰고 있는 곳이었다.
○ 개발인력 총출동한 대작
85S9는 이제까지의 일반적인 TV와는 확연히 다른 모양새다. 플라스틱이 아닌 알루미늄으로 제작한 프레임 속에 마치 이젤에 걸린 캔버스처럼 TV 디스플레이가 들어 있는 형태다. 최용훈 수석연구원은 “처음 디자인을 접한 순간 당황하다 못해 막막함을 느꼈다. 디자인의 독특한 원형을 최대한 살리면서 제품을 양산하려면 음질, 화질 등 풀어야 할 숙제가 하나 둘이 아니었다”면서도 “경영진이 기대하는 수준 이상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에 거의 집착하다시피 했다”고 말했다.
박재후 책임연구원은 “사실상 삼성전자 전체 TV 개발인력이 투입됐다”며 “화질과 음질, 회로 등 각 분야 전문가들이 그동안 꾸준히 연구해 온 개선책을 새로운 TV에 적용하기 위해 태스크포스팀(TFT)처럼 모여 수시로 머리를 맞댔다”고 거들었다.
1989년 삼성전자에 입사해 세계 최초 디지털 TV와 발광다이오드(LED) TV 등을 개발한 배영재 수석연구원은 “TV 화면이 커지면 픽셀의 크기도 함께 커지기 때문에 자칫 픽셀이 알갱이 형태로 눈에 보일 수 있는데 그를 최소화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며 “밝기도 기존 제품 가운데 가장 밝아 훨씬 선명한 화질을 제공한다”고 설명했다.
○ 독특한 프레임 속 숨은 비밀
독특한 디자인만큼 프레임을 만들기도 어려웠다. 특히 프레임의 핵심인 다리 부분을 가공하는 시간은 일반 TV 스탠드보다 1만 배 이상의 시간이 걸렸다. TV 자체는 85인치 형이지만 실제 프레임 치수는 95인치를 넘어선다. 신뢰감과 중후함을 강조하는 차가운 메탈 느낌을 살리기 위해 KTX 본체에 쓰는 최고 사양의 알루미늄을 사용해 무게도 60kg 가까이 나간다.
이 프레임 속엔 디자인 외에 기능적인 요소도 들어 있다. 김민 수석연구원이 “음질을 비교하려고 일부러 준비했다”며 85S9의 양 옆에 설치돼 있던 최고급 홈시어터 스피커를 켰다. TV와 스피커의 볼륨을 번갈아가며 높이자 기자의 ‘막귀’에도 확실한 차이가 느껴졌다. 85S9의 프레임에서 울려 나오는 클래식 음악은 작은 바이올린 반주까지 생생하게 들렸다.
소리가 웅웅거리는 바이브레이션 현상을 잡으려면 나사가 많이 필요하지만 이상적인 디자인을 유지하기 위해 나사 개수를 최소화해 TV 안쪽에 배치하는 기술을 개발해냈다. 프레임과 스피커를 감싸는 천 역시 두께와 밀도에 따라 음질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백방으로 찾은 끝에 유럽에서 공수해 왔다.
○ TV계에 새로운 획 그을까
결국 85S9는 관람객들의 큰 관심 속에 1월 CES 무대에 무사히 올랐다. 박 연구원은 “CES 때 일부러 관람객들 사이에 섞여 반응을 지켜봤는데 ‘전시용 제품 아니냐’, ‘실제 출시되느냐’라고 바이어들이 질문하자 뿌듯함을 넘어 울컥하는 심정이었다”고 돌이켰다.
삼성전자는 7년 연속 세계 TV 1위를 기념해 77대 한정으로 국내 시장에 85S9를 예약 판매하고 있다. 4000만 원의 만만치 않은 가격이지만 두 대씩 계약하는 사람들도 있다.
예상보다 뜨거운 반응 속에 현재 삼성전자가 가장 우려하면서도 동시에 기대하는 점은 후발주자들이 얼마나 빨리 따라오느냐다. 디자인을 그대로 베끼지 못하도록 의장특허와 프레임특허를 냈지만 한편으론 중국 업체 등 ‘패스트 팔로어(Fast Follower)’들이 발 빠르게 뒤따라와야 85S9가 TV계에 새로운 하나의 획을 그을 수 있기 때문이다.
배영재 수석연구원은 “그저 직사각형 일색이던 TV가 처음으로 다른 모양으로 변신한 것”이라며 “이제까지 달려왔으니 돌아보고 더 업그레이드해 UHD TV가 삼성전자의 혁신을 이끄는 제품으로 자리 잡게 할 것”이라고 말했다.
수원=김지현 기자 jhk85@donga.com
김호경 인턴기자 한양대 법학과 4학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