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율곡 이이 평전’ 펴낸 한영우 교수
한때는 방황하는 청춘이었고 평생 인간적 고민을 안고 살았던 율곡에게 주목한 ‘율곡 이이 평전’을 펴낸 한영우 이화여대 이화학술원 석좌교수. 동아일보DB
율곡 이이(1536∼1584)는 젊은 시절 이모부 홍호에게 이런 심경을 토로한 글을 보냈다. 그는 16세에 자신의 우상과도 같던 어머니 신사임당을 여의고 큰 충격과 슬픔에 빠졌다. 서모(庶母·아버지의 첩)와의 사이까지 나빠지자 19세 때 아버지는 물론이고 모든 가족에게 알리지도 않고 금강산으로 들어가 승려가 됐다. 성리학이 국가의 근본이던 시대에 이는 용납하기 어려운 이단 행위였고, 무단가출은 큰 불효였다. 1년 뒤 환속했지만 승려 생활은 부끄러움과 상처로 평생 그를 따라다녔다. 그는 훗날 선조 임금에게 “집으로 돌아와 죽도록 부끄럽고 분함을 느꼈다”며 당시의 심정을 밝혔다.
율곡은 과거 시험에 아홉 번이나 장원 급제한 천재 관료이자 위대한 개혁사상가, 교육가, 효자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 이면에 가려져 있던 율곡의 인간적 고뇌와 약점에 주목한 평전이 나왔다. 한영우 이화여대 이화학술원 석좌교수(75)가 쓴 ‘율곡 이이 평전’(민음사)이다.
오늘날 많은 사람이 고민하는 경제적 곤란, 상사와의 갈등, 따돌림은 사실 율곡이 처한 문제이기도 했다. 율곡은 20대 초반에 성균관에 입학해 알성시(謁聖試·비정규 과거시험)에 응시했는데, 한때 승려였다는 이유로 다른 유생들이 그를 성균관에 못 들어오게 하며 따돌렸다. 요즘으로 치면 집단따돌림(왕따)을 당한 셈이다.
율곡이 개인적 고통에도 비뚤어지지 않고 관료이자 학자로서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위태로운 나라의 상황을 감지하고 시대적 사명감을 자각했기 때문”이라는 게 한 교수의 설명이다. 율곡은 집이 오래되어 서까래가 썩고 기와가 부서지듯이 개국 200년이 가까워지는 조선도 쇠락으로 치닫고 있다며 이를 바로잡는 것을 자신의 사명으로 여겼다.
한 교수는 오늘날 율곡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를 그의 ‘경장(更張)’에서 찾았다. 경장은 왕조의 기본 틀을 유지하면서도 민생을 파탄으로 몰아간 잘못된 제도를 고치자는 것. 한 교수는 “경장은 수구도 혁명도 아닌 온건한 개혁으로, ‘강남스타일’을 본떠 ‘율곡스타일’이라 부를 수 있다”며 “기득권만 지키는 보수, 근본을 송두리째 뒤집어엎는 진보가 아니라 부단히 자기 혁신에 노력하는 개혁적 보수의 정신을 배워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