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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인준 칼럼]대통령, 결국 자신과 싸운다

입력 | 2013-02-19 23:13:00


배인준 주필

노무현 정부 1년 차이던 2003년 8월 5일 처음 쓴 기명칼럼(대통령이 ‘코끼리를 춤추게 하라’를 읽었다면)에서 나는 “편 가르기를 그만두고, 누가 뭐래도 마이웨이를 가겠다는 고집을 버리라”고 노 대통령에게 권고했다. 또 ‘코드’가 다른 사람들에게도 국가경영의 길을 물으라고 주문했다. ‘대통령은 그래야 한다’고 대다수 국민이 공감하는 바를 가감 없이 전한 글이었다. 부질없는 ‘만약’이지만 노 대통령이 아집과 독선과 분열의 정치가 아닌, 경청과 포용과 통합의 정치를 폈더라면 대한민국 역사와 그 자신의 운명도 좀 달라지지 않았을까.

화려하게 등장해 초라하게 퇴장한 대통령이 많았던 것은 국민의 기대와 요구가 너무 큰 탓도 있을 것이다. 이명박 대통령에 대해서도 국내 지지도와 외국인들의 호평 사이에는 늘 상당한 온도 차가 있었다. 그러나 대통령의 성공 여부는 결국 그 나라 국민의 ‘짠 평가’에 달려 있는 걸 어쩌겠는가. 표변하는 민심 앞에 발가벗겨지는 것이 대통령의 숙명이라면 숙명이다.

우리 전직 대통령들은 ‘버림과 비움의 지혜’를 행동으로 옮기는 데 실패하거나 미숙해 하산 길의 쓸쓸함을 자초하는 경우가 많았다. 최고지도자라는 더 바랄 것 없이 큰 영예를 얻었음에도 ‘내 손안의 사람들만 챙기고 중용하는 협량 인사, 가족과 친인척의 세속적 이익에 연연하는 잡인 행태’ 등을 버리지 못한 탓이 컸다. ‘특수한 연고가 있는 내 사람, 노(No)를 모르는 예스맨’을 골라 씀으로써 인사를 망사(亡事)로 만들곤 했다. 한통속 인사는 청와대 안에서나 통할 ‘자기변호의 집단사고(思考)’를 조장해 정권의 위기가 와도 감지하기 어렵게 한다. 이명박 대통령의 내곡동 사저 파동 같은 것이 그의 적지 않은 업적까지 퇴색시킨 것 역시 안타까운 일이다. 임기 초반, 권력에 도취해 오만과 독선을 극기(克己)하지 못한 대통령들은 민심 이반을 자초하고 레임덕을 앞당겼다. 대통령의 가장 위험한 말 가운데 하나가 ‘내가 잘 아는데…’ 하는 말이다.

지난해 국내에서 ‘최선의 결정은 어떻게 내려지는가’라는 제목으로 번역 출판된 미국 경영서 ‘저지먼트 콜스(Judgment Calls)’가 제시하는 답은 모든 리더가 참고할 만하다. 세계적 경영 구루로 꼽히는 토머스 대븐포트 등 저자들은 “아무리 뛰어난 지도자라도 가끔은 잘못된 결정을 내리며, 최악의 지도자들은 그런 결정을 자주 내린다. 답은 위대한 인물이 아니라 위대한 조직에 있다”고 강조했다. 저자들은 많은 사례를 검증해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미래의 리더는 중요한 결정을 혼자 내리는 게 아니라 최선의 결정이 내려지도록 조직의 역량을 키우는 사람이다. 특출한 통찰력이나 지능을 갖추고 모든 판단을 혼자서 내리는 대신, 많은 사람의 집합적 판단, 새로운 도구들과 정보의 힘을 받아들이고 최대한 활용하는 데 리더의 역할이 있다.” 나와 다른 판단과 정보에 겸허해야 한다는 메시지가 들어 있다.

기업 경영이 그럴진대 국정(國政)은 더 말할 나위 없다. 5000만 국민의 삶은 서로 충돌하는 욕구와 갈등으로 뒤엉켜 있다. 1인당 국민소득이 2만3000달러에 근접하고 세계 8대 무역대국이 됐지만 경제는 언제 무엇이 터질지 모를 ‘지뢰밭’이다. 김일성 세습 왕조의 어린 3대(代)는 핵과 미사일의 위험한 불장난에 빠져 있다. 한순간의 안이함도 용납되지 않는 안보와 경제 비상(非常)의 연속이다. 세계는 대한민국을 보며 경탄하고, 북한을 보면서는 개탄하지만 우리에게 북한은 국가와 국민의 운명을 가를 존재다. 머리 위에 핵(核)모험주의 정권이 존속하는 한 진정한 평화는 없다. 평양 세력을 어찌할 것인가.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입각한 평화적 통일’을 향한 원대하고도 치밀한 구상과 행동 속에서 답이 나와야 한다. 경제도, 안보도, 민족의 장래도 대통령 한 사람의 판단과 능력으로 쾌도난마(快刀亂麻)하기는 불가능하다.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은 전임 대통령들이 부족했던 ‘자기극복의 지혜’를 잘 발휘해 본인의 희망대로 5년 뒤 축복받는 퇴장을 할 수 있을까. 대통령에 이르는 험난한 도정에서 숱한 난관을 돌파했으니 ‘역시 내가 옳았다’는 자신감이 앞설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누구든 언제나 옳을 수는 없다.

대한민국은 눈부신 성공을 했지만 진정한 선진국은 아직 멀다. 법을 만드는 국회의원부터 자신들의 이익 앞에서는 법을 헌신짝처럼 내팽개치기 일쑤이고, 사회 곳곳에 떼법과 폭력이 여전하다. 대한민국 역사에 자부심을 갖기는커녕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나라’라고 국가 정통성을 부정하는 세력이 오히려 활개를 친다. 대통령이 이뤄야 할 통합은 ‘대한민국을 아끼고 지키려는 국민’을 위한 통합이다. 사람에게 인격이 있듯이 나라에는 국격(國格)이 있다. 더 성숙되고 격상된 국민의식이 사회 전반에 뿌리내리도록 하는 리더십도 절실하다.

이제 닷새 뒤면 지난 두 달간 당선인으로 불렸던 박근혜 18대 대통령이 대한민국의 새로운 5년을 이끈다. 그는 ‘자신과의 싸움’으로 국민의 희망과 불안에 답해야 한다. 이 5년이 대한민국의 더 먼 장래 국운(國運)까지 가를 수 있다.

배인준 주필 injoo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