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당시 비행사는 비행가라는 호칭이 붙을 정도로 신망의 직업이었습니다. 안창남은 휘문고보 시절, 미국인 스미스의 시범비행을 보고 하늘을 자유롭게 날고 싶었습니다. 1918년 오사카 자동차학교와 아카바네 비행기제작소를 거쳐 1920년 일본 오구리 비행학교에서 조종술을 배웠습니다. 이어 1921년 일본 항공국에서 실시한 ‘제1회 비행사면허시험’에 합격해 최초의 한국인 비행사가 됐습니다.
같은 해 11월 도쿄와 오사카의 왕복 우편비행경기에서 최우승상을 받으며 절정의 실력을 뽐냈습니다. 그는 1922년 12월 10일 동아일보사가 주최한 ‘고국 방문 대비행’을 통해 꿈에 그리던 모국의 창공을 날았습니다. 한반도 지도가 선명한 ‘금강호’가 조선의 하늘을 향해 힘차게 솟구치자 여의도에는 전국에서 몰려든 5만여 관중의 우레와 같은 함성과 열렬한 박수가 울려 퍼졌습니다.
다음 소개할 인물은 엄복동입니다. 자전거 하나로 식민지 민족의 억눌린 울분을 통쾌하게 씻어 준 ‘자전거 왕’입니다.
조선에 1900년대 초부터 서양의 자전거가 보급되면서 자전거 대회는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그는 경기 평택의 자전거 판매상인 일미상회 점원으로 일하면서 자전거로 경성과 평택을 오가며 체력을 쌓았습니다.
영국이 일본에 선물로 제공한 경주용 자전거가 스포츠 후원업체였던 일미상회로 들어왔습니다. 엄복동은 이 자전거를 주로 이용했습니다. 1913년의 1회, 1922년의 2회 ‘전 조선 자전차 대회’를 통해 엄복동은 민족 영웅으로 떠올랐습니다. 1930년대 초까지 일본 선수들의 야비한 방해로 여러 차례 부상을 당했지만 그의 질주를 막을 일본 선수는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세 번째 영웅은 어릴 때부터 육상에 소질을 보였던 손기정입니다. 1931년 10월 전국체육대회(조선신궁대회) 5000m 2위, 1932년 동아일보 주최 하프 경영(京永)마라톤 2위를 했고, 마라톤의 요람인 양정고보에 입학해 본격적으로 마라톤 훈련을 받았습니다.
손기정은 일본식 이름인 기테이 손으로 출전했고, 일장기를 달고 1위에 올랐기에 기쁨을 감춘 채 조용히 퇴장했습니다. 스타디움에 일장기가 오르고 기미가요가 흘러나올 때, 월계관을 쓴 선수는 자신의 영광이 국권을 찬탈한 일본에 돌아가자 고개를 들지 않았습니다. 일본 국적으로 얻은 올림픽 금메달이었지만 손 선수의 우승 소식은 조선인에게는 한없는 기쁨과 희망, 자신감을 안겨줬습니다.
신문박물관에 오시면 당시 동아일보에 실렸던 이 세 영웅의 사진을 볼 수 있습니다.
이문순 신문박물관 교육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