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도 변하지 않으면 죽는다… 우리 것이어야만 세계와 통한다”
전광영 작가의 작품은 수백∼수천 개 스티로폼 조각을 한지로 싸서 붙이느라 엄청난 수작업이 들어간다. 마치 화성이나 달 표면을 연상케 하는 작품을 내놓았던 그는 요즘엔 색을 도드라지게 하는 신작을 선보이고 있다. 성남=박경모 전문기자 momo@donga.com
《 21일 만난 전광영 작가(69)는 앉자마자 양복 안주머니에서 A4용지 한 장을 꺼내들었다. 인터뷰를 앞두고 간밤에 생각을 정리한 메모라고 했다. 열정적이면서도 담백한 평소 모습 그대로였다.
“작가가 자기 작품에 담긴 철학을 정리하려면 3가지 요소가 있어야 해. 첫째, 크리에이티브(creative), 독창성이야. 그렇다고 제멋에 취하면 안 돼. 대중하고 소통을 해야지. 둘째, 재미가 있어야 해. 셋째 투자가치도 있어야 해. 뜨는 작가란 것은 이런 것들이 합쳐질 때 되는 거지.”
앞에 놓인 냉수 한 컵을 들이켠 그가 다시 말을 이었다
쓰레기통서 빵 주워먹은 미국 유학생활
‘집합’ 시리즈 중 하나(2011년). 전광영아트센터 제공
지난해 미국 3개 대학 미술관 순회전을 차례로 마친 그는 새해 독일 베를린 국립미술관, 영국 아시안아트센터·스코틀랜드미술관 전시를 확정했고 영국 빅토리아앨버트 미술관과 베를린 국립미술관 작품 판매도 확정됐다. 바야흐로 상업 작가에서 예술가로 대접받고 있는 것이다. 한류 바람이 어느 때보다 높은 요즘, 세계 시장에서 그의 작품이 먹히는 이유가 뭘까. 대화는 다시 미국 이야기로 돌아갔다.
“(미국서) 내가 받아온 교육에 문제가 많다는 걸 느꼈어. 우리는 빨간(색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빨간 스타일로만 그리도록 가르치고 파란 사람이 가르치면 파란 스타일로만 하잖아. 거기에 안 맞춰 주면 점수가 안 나오고. 나도 그렇게 훈련이 됐지. 한국에서 홍익대 나와 그림 잘 그린다 생각하고 미국엘 갔어. 그런데… 우리가 외국인들에게 김치를 주면 ‘매워’ 하면서도 잘 먹는 거 보면서 좋아하지만 속으로는 ‘너희들이 우리 혓바닥에서 느끼는, 우리 유전자에 박힌 김치 맛은 죽어도 못 느낄걸’ 하고 생각하잖아. 그게 바로 나였어. 서양 애들이 볼 때 ‘동양 애가 우리 것을 잘 그리네’ 하지만 걔네들 입장에서 흉내밖에 안 된 거야. 그러니 주변에서 빙빙 돌 수밖에. 그림 한다고 아버지와 의절하고 미국까지 왔는데 이건 아니구나. 그때 내 심정이 어땠겠어.”
그는 4년 내내 대학 학비를 아르바이트로 벌어 졸업한 뒤 명문으로 꼽히는 필라델피아예술대 미술대학원에 진학했다. 미국에서 보란 듯이 성공해 본때를 보여주고 싶었다. 하지만 생활은 비참했다. 남들이 먹다 버린 빵을 쓰레기통에서 주워 잇자국 난 부분을 떼내고 먹을 정도로 가난했다. 학교를 졸업하고는 바로 불법체류자가 되었다. 공장에서 일하다가도 이민국에서 전화라도 걸려오면 월급도 못 받고 줄행랑을 쳤다. 두 번이나 자살을 기도했을 정도였다. 무엇보다 힘들었던 것은 아무리 열심히 해도 주류가 될 수 없다는 자괴감. 모든 것을 포기하고 한국으로 돌아오는 그의 머릿속엔 오로지 하나의 생각뿐이었다. ‘나만의 것을 찾아야 한다.’ 그는 전국의 민속박물관을 돌아다녔다.
한약방 천장에 매달린 약봉지서 ‘나’ 를 찾아
“온양 민속박물관에는 서른 번 이상 갔을 거야. 넋 놓고 앉아 있다 보면 아낙네들 방아 찧는 소리가 들려. 노비들이 신세 한탄하는 소리도 들리고. 제주민속박물관 똥통 앞에서 하루 종일 생각에 잠기고는 내가 똥통이나 오줌통 져 날랐던 한국인이었구나, 그런 내가 자유의 여신상을 그린다고 했으니 먹혔겠나… 이런 생각이 들더군.”
“‘나’를 알았다 해도 어떻게 표현하겠어? 우선 재료를 고민했지. 그러다 ‘한지’가 떠오른 거야. 내가 강원 홍천 시골 촌놈인데 천장도 한지고 바닥도 창문도 한지였지. 내 안에서 자꾸 내 것을 찾다 보니 한지가 떠오르더라고.”
그것을 그대로 그릴 수도 있고 붙일 수도 있었을 텐데 어떻게 (스티로폼을 넣고) 싸맬 생각을 했을까.
“큰할아버지가 한약방을 했어. 천장에 매달아 놓은 약봉지 이미지가 떠오른 거지. 재료는 한지로 하되, 약봉지처럼 싸자. 미국 애들은 정확한 ‘박스’ 문화잖아. 크레디트(신용) 사회고. 우리는 보자기 문화, 정(情)의 문화. 그걸 표현하자는 생각이 든 거지. 일단 보자기처럼 한지로 싸겠다는 생각까지는 왔는데 그럼, 어떻게 싸느냐. 그러던 중에 한일교류전 때문에 일본 오키나와에 갔다가 밥집으로 밥을 먹으러 갔어. 근데 밥집 앞에 주먹밥을 바나나 잎으로 삼각형으로 싸서 매달아 놓은 거야. 저거다! 싶었지. 나도 한지로 삼각형을 만들어 싸매자. 처음엔 안을 채울 게 떠오르지 않아 느낌이 비슷한 신문지를 접어 표현했어. 무거운 게 흠이었지만 세상 어디에도 없는 나만의 작품이라는 생각에 뿌듯했지.”
화가가 20여 년 동안 해온 캔버스를 버리고 완전히 다른 재료와 방법을 쓴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게다가 독창적인 나만의 작품을 만들었다는 생각에 야심 차게 개인전(1989년)을 열었지만 다시 실패였다.
주변의 모든 것을 찍고 영감이 떠오를 때마다 메모한다는 전광영 작가의 수첩 중 한 쪽.
―지금도 신작에 몰두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한지 작업 이후 15번도 더 바뀌었어. 내가 촌놈인데 요즘은 구렁이야(웃음). 서양 애들은 작품이 안 바뀌면 얼굴이 싹 변해. 어떤 점에선 당연한 거지. 투자가치가 있다 생각하고 비즈니스를 했는데 2, 3년 지나도 신작이 안 나오면 이 작가에게 더 투자를 할 필요가 있나 이렇게 생각하는 거지. 서양 애들이 얼마나 잔인한지 알아? 외국에서 전시 개막하고 다음 날 한국으로 떠나면서 슬쩍 ‘다음 전시 어떻게 생각하고 있느냐’ 물으면 ‘아일 콜 유(I'll call you)’해. 근데 그게 끝이야. 10년 지나도 전화가 안 와(웃음). 난 너무 많이 당했지. 뉴욕의 5대 화랑 정도에서 전시하려면 전 세계 작가들이 경쟁 상대야.”
―예술가들이 그런 긴장감이나 무게감을 못 이겨 자살까지도 하는 것 아닌가.
“나는 아직도 가끔 우울증에 시달려. 신작에 대한 압박감이 엄청나지. 변하지 않으면 불안해. 새로운 것, ‘생쇼’라도 해야지.”
그가 갑자기 스마트폰을 열었다.
“내가 하루에 동아일보 포함해서 신문 세 개를 봐. 재미있는 이미지, 기사 다 찍어 놓는다고. TV 화면도 찍어.”
그가 한 이미지를 보여줬다. 수신이 불량한 TV화면이었다. 그런데 한 폭의 추상화처럼 보였다. 스마트폰이 나오기 전에는 휴대용 카메라를 들고 재미있는 이미지라고 생각되면 무조건 찍어댔다는 그는 현재 컴퓨터에 3만여 컷의 이미지가 저장되어 있다고 했다. 실제로 기자는 그의 작업실을 들여다보고 깜짝 놀랐다. 오래된 그릇에, 사진에 온갖 잡동사니 천국이었다. 그의 작품들이 ‘엄청난 몰두’라는 노력의 산물이라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한국작가 한국냄새 안나고 ‘Just like New York’
―생전에 백남준 선생과 인연이 깊었다고 들었다.
“1970년대 초 미국에서야. 아는 선배 소개로 만났지. 백 선생은 이미 유명했어. 만나면 둘이 앉아가지고 벤치에서 맥주 한 캔 들고 얘기가 끝이 없었어. 그때 백 선생은 ‘독일이나 미국에서는 알아주는데 왜 한국에서는 나를 미친놈 취급하느냐’고 서운해했지. 88 올림픽 전까지는 그를 아는 사람이 없었잖아. 나 역시 한국 화단에서 따돌림 당할 때 백 선생 생각 많이 했지. 오로지 작품! 작품밖에 없었던 선생의 삶에서 용기를 얻었으니까.”
―국내에서 활동하는 작가가 대략 10만 명, 매년 쏟아져 나오는 예비 작가만도 4000명이라고 한다. 후배들에게 조언을 해준다면….
“너무 빨리 대가가 되고 싶어 하는 거 같아. 너무 서둘러. 나도 50년 하다 보니 이제야 뭔가 보이는 듯한데. 남의 것을 베껴도 몇십 년 하다 보면 거기서 자기 것을 만들어낼 수 있어.”
―한국 미술의 세계화를 위해서는 뭘 해야 하나.
“나는 우리 작가들이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고 있다고 봐요. 하지만 특색이 없어. 요즘 인도 경제가 뜨니 인도 작가들이 뜨잖아. 어딘지 모르게 카레 냄새가 나. 뭔가 인도적인 분위기가 보인다는 이야기야. 일본도 세계적인 작가라 할 수 있는 무라카미 다카시나 나라 요시토모 같은 작품을 보면 뭔지 만화 같은 기분이 들잖아. 중국 것을 보면 또 중국적인 얘기가 보이고. 근데 한국은 모르겠어. 작품들은 좋고 멋있고 기가 막힌데…. 1990년대 중반 미국 뉴욕의 유명 큐레이터가 한국에 와서 한 첫마디가 ‘저스트 라이크 뉴욕(Just like New York)’이었어. 칭찬이 아니라 뉴욕과 똑같다는 거야. 뭔가 다른 줄 알았는데 똑같다고 비꼰 거지.”
허문명 오피니언팀장 angelhuh@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