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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동 꺼! 반칙운전/2부] 너무 높은 도심 제한속도

입력 | 2013-02-25 03:00:00

일산-분당 길 넓다고 70∼80km OK… 보행자엔 ‘살인 속도’




[시동꺼! 반칙운전] 너무 높은 도심 제한속도

‘노인보호구역(SILVER ZONE), 70, 여기부터 300m, 속도를 줄이시오.’

경기 고양시 일산동구 장항동 일산노인종합복지관 앞 도로표지판 내용이다. 최근 한국교통연구원 성낙문 연구위원(51)과 함께 차를 타고 일산 호수로를 달리던 기자는 이렇게 쓰여 있는 노란색 표지판을 보고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 성 연구위원이 표지판 내용을 설명해 줬다.

‘노인보호구역이니 천천히 달리되 300m 앞부턴 시속 70km로 달려도 된다.’

하지만 일반적인 표지판을 읽듯이 해석하면 제한속도가 통상 30km인 노인보호구역에서 두 배 이상의 속도로 달려도 괜찮다는 ‘과속질주’ 표지판처럼 보인다. 근처 어디에도 시속 몇 km로 달려야 하는지 설명을 찾을 수 없었다.

○ 과속을 자극하는 도로


일산신도시의 제한속도인 시속 70km는 선진국에서는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높은 수준이다. 그렇다면 더 철저히 관리돼야 할 텐데, 현실은 그 반대였다.

일산로에 들어서자 장촌초등학교 스쿨존이 나타났다. 제한속도 시속 30km. 곧 스쿨존이 끝나자 다시 제한속도가 시속 70km로 높아졌다. 그런데 연이어 장성초등학교 스쿨존이 나타났다. 제한속도는 다시 시속 30km로 낮아졌다. 고작 900m 정도의 일직선 구간에서 제한속도가 시속 70km→30km→70km→30km→70km로 널뛰기를 했다. 두 스쿨존 사이에 낀 시속 70km 표지판과 스쿨존 시속 30km 표지판의 거리는 고작 50m 정도여서 두 표지판이 한눈에 들어와 혼선을 줬다. 성 연구위원은 “스쿨존 제한속도는 시속 30km라는 형식논리에 매달린 전문성 없는 행정이 낳은 결과”라며 “제한속도가 이렇게 급격하게 변하면 제한속도를 따르는 차들이 급감속하다 오히려 사고를 유발하게 된다”고 지적했다. 그는 “선진국의 경우 같은 구간에선 제한속도를 같게 유지하고 교차로가 나타날 때부터 속도를 줄이도록 한다”며 “학교가 연속해서 있다면 도로 전체의 제한속도를 시속 40km 정도로 낮춰놓고 운전자의 자발적 서행 운전을 유도하는 게 현실적”이라고 설명했다.

자유로로 연결되는 장항 나들목 부근의 법원·검찰청 일대도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제한속도는 시속 70km였다. 차량 대부분이 제한속도 밑인 40∼50km로 주행하고 있었다. 짧으면 100m, 길어도 300∼400m마다 신호등이 있어 속도를 내기가 쉽지 않아 보였다.

성 연구위원은 “도로 여건상 잘해야 50km로 달리면 되는데 제한속도가 이보다 높게 설정돼 있으니 운전자에게 ‘조금 더 밟으라’고 과속을 부추기는 것과 마찬가지”라며 “급가속 급정거를 유발하는 도심의 과속 제한속도를 빨리 낮춰야 한다”고 지적했다.

도심 지역의 이런 엉터리 속도 관리는 일산만의 문제가 아니다. 분당신도시(경기 성남시)도 마찬가지였다. 분당의 중심지인 서현사거리의 경우 사람이 많이 다니지만 길이 넓다는 이유만으로 제한속도가 일산의 자동차 전용도로인 제2자유로와 같은 시속 80km였다. 성남한솔초등학교 근처에서는 스쿨존 표지판과 시속 70km 표지판이 같은 기둥에 달려 있는 어이없는 장면도 볼 수 있었다. 인천 부평구의 동소정사거리도 제한속도가 80km로 돼 있는 등 운전자의 과속 심리를 자극하는 높은 제한속도가 곳곳에서 확인됐다.

물론 분당 일산 등 신도시는 도로망이 반듯하고 넓은 차로를 갖추고 있다. 하지만 인구와 차량 모두 계획보다 크게 늘어나 적지 않은 사고 위험에 노출돼 있다. 인구 밀집지역에서 제한속도를 시속 70km로 정한 선진국은 찾아볼 수 없다. 시속 70km면 제2자유로의 제한속도와 비슷한 수준이다. 보행자 사망 사고를 부르는 이유다.

○ 과속은 상대적, 30km도 사람 잡는다

지난해 9월 서울 서초구 서초동, 10월 서울 도봉구 방학동, 12월 서울 양천구 신월동에서 각각 50, 60, 80대 여성이 길을 걷다 차에 치여 숨지는 사고가 발생했다. 이들 사고의 공통점은 사고 당시 차량 속도가 시속 30km대였다는 점. 제한속도에 훨씬 못 미치는 속도로 달리는 차들조차 노약자들에게는 죽음을 불러올 정도의 큰 충격이었다. 우리나라는 이들 사고처럼 보행자가 차에 치여 죽는 사고의 비율이 선진국을 압도한다. 인구 10만 명당 보행자 교통사고 사망자 수는 독일 프랑스 일본 등이 0.6∼1.6명인 데 비해 한국은 4.3명이다. 국내 전체 교통사고 사망자 중 보행자 비율도 38.2%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인 17%보다 배 이상 높다. 지난해 일산 지역은 이 비율이 57.14%였다(교통사고 사망자 28명 중 보행자 16명).

교통 전문가들은 너무 높게 설정된 도심 제한속도를 원인으로 꼽는다. 서울 기준 우리나라의 도심 제한속도는 시속 60km 정도. 하지만 독일 영국 캐나다 등 선진국은 대개 시속 50km 정도이고 일부는 시속 30∼40km인 곳도 있다. OECD 국가 중 도심 제한속도가 시속 60km가 넘는 나라는 우리나라와 러시아, 멕시코 정도다.

고작 10∼20km 차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보행자에게는 생사를 가르는 엄청난 차이다. 물체의 에너지는 속도의 제곱에 비례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교통안전공단의 지난해 실험 결과 보행자가 시속 30km와 40km로 달려오는 차에 부딪혔을 때 머리에 중상을 입을 가능성은 각각 16.9%와 28.1%였지만, 60km일 때는 99.9%였다.

이원화된 관리 책임도 문제다. 고속도로는 차들이 빠른 속도로 달리지만 한국도로공사와 같은 전문기관에서 관리하기 때문에 오히려 사망자는 적다. 교통사고 사망자의 대부분은 일반국도나 지방도에서 나오는데, 이들 도로의 시설관리는 지방자치단체가 맡으면서도 제한속도는 경찰이 정한다. 성 연구위원은 “전문성을 가진 도로관리청이나 지자체가 속도 관리를 전담하게 해 체계적으로 제한속도를 정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김성규 기자 sunggyu@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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