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규선 논설위원실장
더 큰 걱정은 따로 있다. ‘준비됐다’는 박 대통령에 대한 기자들의 경외심이 사라질까 봐서다. 인내심이 바닥을 치고 있기 때문이다. 이번 대통령직인수위원회는 그런 사태를 예고하는 연습장 같았다. 자기가 필요할 때만 나와서 할 말만 하고 들어가고, 기자들이 정작 궁금한 것은 아무도 알지 못하며, 항의를 해도 메아리조차 없는, 이렇게 무례한 인수위는 이제껏 없었다.
지난해 말 대통령 선거 이후 한국의 언론은 ‘하향평준화’됐다. 기자들의 최대 승부처인 굵직한 인사를 특종한 신문이나 방송이 없다. 인사 특종은커녕 예고된 기자회견 5분 전까지도 무엇을 발표할지조차 몰랐다. 기자들의 굴욕이다. 기자들이 취재를 못 해 놓고 왜 남 탓을 하느냐고 한다면 감수하겠다. 그러나 취재 환경이 기자실에 대못을 박았던 노무현 대통령 때보다 더 못하다는 말이 나오는 건 어쩔 건가. 노 대통령 때는 벼락 우대를 받은 언론이라도 있었는데 지금은 몽땅 무시당하고 있다는 얘기다. 한국 기자가 아니라 외국 기자의 평이다. 물론 한국 기자들도 전적으로 동의한다.
누구나 다 아는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는 경문왕 설화는 알고 있으면 말하고 싶어진다는 게 교훈이라면 교훈이다. 1100년도 더 된 옛날, 통일신라시대의 얘기다. 그런데 오늘날의 박 대통령은 그런 본능조차 억제한다. “촉새가 나불거려서…”라는 말 한마디로 주변 사람들의 입을 봉해 버렸다. 나불거린 게 당 비대위원 명단 정도인데 효과가 오래도 간다.
촉새도 새다. 기자에겐 촉새가 필요하다. 개인적인 호기심에서가 아니다. 그들의 귀띔으로 세상의 물줄기를 바꾼 경우가 수도 없이 많다. 그렇다고 촉새처럼 정보를 흘려 달라는 얘기도 아니다. 편하게 기자생활 하고 싶은 생각 없다. 가끔 내세(來世)에 다시 태어나면 뭐로 태어나겠느냐는 질문을 받을 때가 있다. “다음에는 정보를 쥐고 있는 사람으로 태어나고 싶다”라고 말한다. 정확한 정보를 얻는 게 얼마나 힘든지를 경험해 봐서다. 거대한 조직비리나 민감한 기사는 숱한 조각을 맞춰야 하는 퍼즐과도 같다. ‘딥 스로트(내부제보자)’나 ‘관계자’라는 ‘용감한 촉새’가 없으면 불가능하다. 그래서 나중에 박수 받는 촉새도 적지 않다.
기자를 우대해 달라는 말도 안 하겠다. 그냥 예전의 대통령만큼만 해 달라는 거다. 대통령이 보기엔 언짢지만 언론으로선 쓸 만한 뉴스가 나왔을 때 ‘촉새’를 찾아내라는 말만 하지 않으면 족하다. 대통령이 화를 내면 청와대와 정부, 말단 공무원의 입까지 꽁꽁 얼어붙는다. 기자와 달리 국민은 ‘팩트’가 아니라 ‘감’으로 판단할 때가 더 많다. 정부가 자꾸만 뭔가를 숨기는 듯하면 국민은 점점 더 정부를 신뢰하지 않게 된다.
지금의 경직되고 일방적인 정보 유통 시스템은 극히 비정상이다. 바꾸지 않으면 공무원은 대통령을 팔아서 점점 더 영악해지고, 국민과 언론은 짜증을 내게 될 것이다. 정권 핵심에서조차 박 대통령에게 직언할 사람이 전무하니 언론과 야당이 나서야 한다는 얘기가 나오는 판국이다. 박 대통령이 언론까지 멀리하면 구름 위에서 정치를 할 개연성이 크다. 박 대통령이 언론관을 바꿔 제발 이런 걱정이 기우가 되길 소망한다.
혼자서 한 결정이 여럿이 한 결정보다 옳을 때도 있다. 그러나 늘 옳지는 않을 것이다. 잘못된 결정을 줄이려면 조언이 필요하다. 서로 불가근불가원(不可近不可遠) 하면 언론도 건전한 비판자로서 훌륭한 조언그룹이다. 평소엔 소 닭 보듯 하다가 필요할 때만 도와 달라고 한다면 그게 가능하겠는가. 기자는 전화만 걸면 달려오는 배달원도, 버튼만 누르면 기사가 나오는 자판기도 아니다.
심규선 논설위원실장 ksshi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