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양전쟁 끝낸 원자폭탄
1945년 8월 6일 오전 8시 16분 일본 히로시마 시내에 원자폭탄 ‘리틀보이’가 투하됐다. 반경 1.6km 이내의 모든 물체가 파괴됐고, 8만 명이 즉사했다. 원폭이 폭발한 후의 시내 모습. 뉴욕타임스 홈페이지
미군 정찰기는 오전 7시 반경 히로시마에 도착하여 폭탄 투하에 적합한 기상상태인지 확인했습니다. 그리고 8시 16분에 폭격기가 원자폭탄을 투하했습니다. 리틀보이(Little Boy)라는 이름의 원자폭탄은 9470m 상공에서 44초에 걸쳐 떨어졌습니다. 그리고 600m 상공에서 폭발했습니다. 공습이 없다고 믿었던 시민들에게는 날벼락이었겠죠.
원자폭탄은 TNT 16kt에 해당하는 폭발을 일으켰습니다. 1kt은 TNT폭약 1000t의 폭발력을 의미합니다. 폭발한 상공 지점의 온도는 섭씨 4000도까지 치솟았습니다. 핵무기가 폭발한 지상 지점(그라운드 제로)에서 반경 1.6km 이내의 모든 물체가 파괴됐습니다. 11km² 이내 지역에서는 모든 것이 불타버렸습니다.
히로시마는 태평양전쟁 중에 미국의 공습을 받지 않았던 도시였습니다. 재래식 폭탄에 의한 폭격 효과와 원자폭탄에 의한 폭격 효과를 비교하기 위해 미국이 의도적으로 남겨둔 곳입니다. 히로시마는 편평한 지역이라 원자폭탄의 효과를 정확하게 측정할 만한 곳이기도 했어요. 또 일본 남부 지역을 지휘하는 군사령부가 있던 군사 중심지였고, 군사 물자를 실어 나르는 주요 항구 중 하나였습니다.
리틀보이는 64kg의 우라늄235로 제작됐습니다. 원래 히로시마 상공 580m에서 폭발하도록 설계됐고, 공식적인 폭발력은 13kt으로 예상됐습니다. 하지만 실제 폭발은 조금 달랐죠. 그리고 바람이 불어서 예상보다 240m 빗나간 병원 상공에서 터졌습니다.
히로시마뿐 아니라 나가사키에도 원자폭탄이 투하되자 일본은 8월 15일 조건 없는 항복을 선언했습니다. 태평양전쟁이 끝난 겁니다. 미국은 원자폭탄이 아니었다면 일본의 결사항전으로 50만∼100만 명의 미국 병사가 전사했을 것이라고 발표했습니다. 일제의 잔인한 식민통치, 인체실험, 무차별 학살, 비인도적인 잔혹행위, 강제노동, 군위안부 성노예 동원에서 우리 민족을 해방했으니 원자폭탄이 고맙다고 생각할지 모르겠네요.
하지만 역사는 그렇게 간단하지만은 않아요. 미국의 공식 주장과 달리 역사가들은 태평양전쟁이 계속됐다면 미국 병사 50만∼100만 명이 아니라 6만 명 정도 더 죽었을 것이라고 추정합니다. 원자폭탄으로 죽은 히로시마의 20만 명, 원자폭탄 덕분에 목숨을 잃지 않은 6만 명의 미국 병사. 무엇이 더 좋은 선택이었을까요.
미국은 왜 원자폭탄을 히로시마에 투하했을까요? 많은 역사가는 소련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미국은 소련이 태평양전쟁에 참가하여 중국에 배치된 일본 육군을 무찌르고 전쟁에서 승리하리라 기대했어요. 포츠담회담에서도 미국은 소련에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그런데 회담 중간에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은 원자폭탄 실험에 성공했다는 보고를 받았어요.
트루먼 대통령은 소련의 도움 없이 일본을 무찌를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전쟁 후의 세계질서를 수립하는 데 소련을 배제하거나 적어도 소련의 영향력을 많이 줄일 수 있다고 봤지요. 그래서 미국은 소련이 태평양전쟁에 참가하려던 8월 8일보다 이틀 전에 원자폭탄을 투하했어요. 전례 없는 새로운 무기를 과시함으로써 소련의 도움이 별로 중요하지 않음을 보여준 겁니다.
제2차 세계대전으로 미국 영국 프랑스에서는 민간인을 포함해 각각 40만∼50만 명이 죽었습니다. 소련에서는 2300만 명이 사망했습니다. 소련이 전쟁 승리에 상당한 공헌을 했지요. 그 대가로 소련은 동유럽을 자신의 세력권 아래에 두려고 했습니다. 미국은 원자폭탄의 위력을 통해 소련의 이런 팽창을 저지하려고 했어요.
미국의 지도자와 과학자들은 원자폭탄을 독점적으로 사용하면 세계가 평화롭게 된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5년이 지나지 않은 1949년에 소련이 원자폭탄을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졌습니다. 작년 기준으로 전 세계에 1만7000개 이상의 원자폭탄이 있다고 합니다. 세계는 더 평화롭게 됐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