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권 전북 동부 산악지에 대규모 가야유적… 학계 실체 싸고 의견 분분
전북 장수군 삼봉리에 있는 가야 고분군을 하늘에서 촬영한 사진(위). 이번에 발굴된 지름 20m가 넘는 돌덧널무덤 대형고분을 중심으로 10여 개의 봉분이 한눈에 들어온다. 경북 고령 중심의 대가야 문명의 영향을 받은 토기들(아래)도 출토됐다. 전주문화유산연구원 제공
특이한 건 고분 형태나 출토품이 대다수 가야 양식이란 점이다. 일반적으로 삼국시대 백제권역으로 인식되는 전북에서 영남 쪽에 자리한 가야의 문화유적이 나오는 건 상식 밖이다. 당시 이 지역에선 무슨 일이 벌어졌던 걸까.
○ 백제 틈새를 노린 대가야의 야망인가
주보돈 경북대 사학과 교수에 따르면 대가야가 전북으로 진출한 결정적 계기는 5세기 초반에 일어났다. 국력이 강성해진 신라가 낙동강 유역을 차지하면서다. 예나 지금이나 강은 국가의 주요 교통로. 강이 없으면 외부와의 교역이 불가능하다. 대가야는 낙동강 대신 이 지역 섬진강 일대를 확보하기 위해 장수지역으로 진출했을 가능성이 있다.
다만 전북지역이 곧장 가야 땅으로 편입되진 않았다. 상당한 힘을 지녔던 토착세력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가야도 굳이 복속시키기보단 연대를 모색하는 방식을 택했다. 주 교수는 “어느 정도 자치권을 가진 형태로 범(汎)가야 연맹에 가담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아무리 사이가 좋았다지만 백제는 왜 가야의 진출을 묵인했을까. 당시 백제가 한강유역에서 고구려와 겨루느라 여력이 없었다. 백제 입장에서 동부 산악지역은 거리는 가깝지만 금남정맥과 호남정맥에 둘러싸여 직접 통치가 불편했다. 대가야가 일정 지분 보장을 약속해 눈감아줬을 가능성이 높다.
○ 독립국가를 꿈꿨던 가야계 소국일 수도
장수 일대가 단순히 가야 영향권에 있었던 게 아니라 하나의 독립국가였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학계에선 장수와 진안을 아우르는 전북 동부 산악지역이 독자적 세력을 유지했다는 시각은 어느 정도 합의를 본 상태. 여기서 더 나아가 ‘가야계 소국’이나 ‘장수가야’로 봐야 한다는 의견도 최근 대두하고 있다.
봉수(烽燧) 역시 중요한 근거다. 현재까지 이곳 주위에선 모두 42개의 고대 봉수 유적이 확인됐다. 봉수란 불과 연기로 소식을 전하는 통신시설로 이 지역 봉수로의 도착지가 장수다. 한 국가의 수도였을 가능성이 점쳐지는 대목이다. 곽 교수는 “장수가야는 세력은 약했을지언정 백두대간 영호남의 핵심 관문인 육십령(六十嶺)을 차지하고 왕국을 건설하려 했던 것 같다”며 “고구려에 패해 남쪽으로 물러난 백제가 6세기 후반 이곳을 점령할 때까지 한 시대를 풍미했다”고 강조했다.
정양환 기자 ra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