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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횡설수설/하태원]종족편견에 이용된 혈액형

입력 | 2013-03-01 03:00:00


고대 로마 역사가 타키투스가 쓴 ‘게르마니아’(98년 작)는 야만인으로 간주되던 게르만족을 강건한 자연인으로 묘사했다. 이미 제국(帝國)을 이뤘지만 퇴폐와 쇠락의 길을 걷던 로마인과 대비시켜 “용감하고 충성스러우며 정의롭고 명예롭다”고 쓰고 있다. 1300년 이상 실종됐다가 15세기 독일의 한 수도원에서 발견된 이 책은 독일 민족주의에 불을 질렀고 훗날 나치는 타키투스의 평가를 게르만 우월주의로 변질시켰다. 순수한 독일 부활을 선언한 히틀러는 ‘이민족과 결혼을 금했다’는 게르마니아를 근거로 유대인과 피가 섞이는 것을 막았고, 유대인 600만 명을 홀로코스트로 몰아넣었다. 로마가 정복에 실패한 지역에 대해 학문적 흥미에서 기록한 1800년 전의 책자가 몰고 온 ‘나비효과’라 하기엔 너무나 참혹한 결말이다.

▷아리안 인종의 ‘종족청소’ 대상이 된 유대인들은 모계혈통을 중시해 어머니나 할머니가 유대인이면 아버지나 할아버지가 유대인이 아니라도 100% 유대인이 된다. ‘씨’보다는 ‘밭’이 ‘피’를 좌우한다고 본 것이다. 선민의식도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1300만∼1500만 명밖에 안 되는 유대인이 인류사에 남긴 화려한 족적(足跡)을 보면 영국 윈스턴 처칠이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인종”이라고 극찬한 것도 수긍이 간다. 유대인 전문가인 박재선 전 주모로코 대사는 자신의 저서에서 “우연인지 모르지만 유대인이 아이를 낳으면 지진아 출생 비율이 매우 낮다고 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일제강점기 일본 의료진이 1920년대 한국인에 대한 혈액형 분류에 집착했다는 한림대 정준영 교수의 연구결과가 화제다. 1919년 폴란드 학자 히르슈펠트가 ‘A형+AB형 인구수’를 ‘B형+AB형 인구수’로 나눈 ‘인종계수’를 통해 ‘진화한 민족일수록 B형보다 A형이 많다’고 내린 결론을 일본인의 인종적 우월성으로 연결하려는 시도였다. 조선 거주 일본인 인종계수는 1.78이었던 반면 조선인은 평균 1.07로 나왔다. 지역별로는 전남(1.41), 충북(1.08), 경기(1.0), 평북(0.83) 등의 순이었는데 일본에 가까운 전남이 그나마 좀 낫다는 궤변으로 ‘내선일체(內鮮一體)’의 정당성을 강조했다.

▷사실 인류를 유전적으로 개량할 목적으로 발전된 우생학은 황화론(黃禍論)에 뿌리를 두고 있다. 유럽인은 A형과 O형이 많고 아시아인은 B형이 많다는 연구결과가 나오면서 B형 열등론(황화론)을 만들어 낸 것이다. 탈아입구(脫亞入歐)를 주장하며 개화에 성공한 일본으로서는 한국인보다 A형 인구가 많았다는 사실로 식민 지배를 정당화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혈액형이 많고 적음이 국가의 운명에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전근대적이라는 건 일본의 패배가 증명하고 있다.

하태원 논설위원 triplets@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