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대통령은 어제 제94주년 3·1절 기념사를 통해 “가해자와 피해자라는 역사적 입장은 1000년의 역사가 흘러도 변할 수 없다”며 일본의 적극적인 변화와 책임 있는 행동을 촉구했다. 박 대통령은 “일본이 우리의 동반자가 되려면 역사를 직시하는 자세를 가져야 하고, 그럴 때 비로소 양국 간의 신뢰와 화해, 협력도 가능하다”는 언급도 했다. ‘미래’도 얘기했지만 ‘과거 청산’에 무게가 있다.
3·1절 기념식은 역대 대통령의 취임 후 첫 국가 공식행사여서 국내외의 관심이 높다. 박 대통령은 이번 기념식에서 역대 대통령들의 첫 3·1절 기념사에 비해 강한 어조로 일본의 변화와 책임을 촉구했다. 다만 독도나 군대위안부를 언급하지 않은 데서 고심한 흔적이 엿보인다.
김영삼(YS) 전 대통령은 첫 3·1절 기념사에서 ‘일제’라는 말을 한 번만 사용했다. 김대중(DJ) 전 대통령은 ‘일본의 중국 침략 와중에서’라는 구절에서 일본을 한 번 언급했을 뿐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일본을 언급조차 안 했다. 이명박(MB) 전 대통령은 ‘미래로 가자. 그러나 역사를 외면해선 안 된다. 그렇다고 과거에만 얽매여 있을 수도 없다’는 취지로 말했지만 길지도 않았고 온건했다. 전직 대통령들이 3·1절 기념사에서 일본을 정면으로 비판하지 않은 것은 ‘과거’보다는 ‘미래’에 무게를 두겠다는 의지를 보인 것이다.
박 대통령은 일본에서 ‘1000년 대통령’으로 기억될 가능성이 높다. 일본 언론들은 박 대통령의 기념사를 소개하며 관계 개선이 쉽지 않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예상보다 발언이 강했다는 뜻이다. 한일 간에는 독도, 군대위안부, 역사교과서 등 지뢰밭이 깔려 있고 일본 지도자의 망언이라는 돌발 변수도 있다. 이달 말경 일본의 역사교과서 검정 결과가 또 한 차례 고비가 될 것이다.
박 대통령은 역대 대통령과 달리 임기 초에 일본에 대해 분명한 입장을 밝혔다. 그 말의 무게를 보여주되 앞으로는 대통령이 직접 나서는 일은 자제하고, 전문가와 참모의 의견을 존중하며, 국익과 과거사를 현명하게 분리 대응하는 게 중요하다. 한일 문제는 차분한 이성보다는 ‘국민 정서’에 좌우되는 경우가 많다. 대통령은 종종 그에 편승하고 싶은 유혹이나 강박에 빠진다. 그러나 내셔널리즘을 부추기는 감정적 대응은 문제를 해결하기보다 양국 국민의 심리적 거리만 더 멀어지게 했다. 지도자가 중심을 잡아야 그나마 관계 악화를 막을 수 있다는 것이 과거의 교훈이다.